위기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검은 백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전적 경고를 외면해온 게 그 원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 바이러스 확산 사태가 대표적 예이다.
2003년의 사스, 2009년의 신종 플루, 2012년부터 시작된 메르스 사태 이후 감염병 재확산에 대한 경고가 잇따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3년 5월 세계적 전염병은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준인데 이에 대한 사전 경고 및 신속한 대응 체제가 부실하다고 경보를 울렸다. 이보다 앞선 2011년 세계적 바이러스 전문가인 네이선 울프는 ‘바이러스 폭풍의 시대’라는 책을 펴내 다가올 ‘바이러스 세계화’를 예고했다.
바이러스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인간이 경제 행위를 위해 바이러스에 다가간다. 도시의 지속적인 확장과 밀림 벌목, 사냥, 도축 등은 바이러스가 득실대는 야생동물을 인간의 삶 속으로 초대(?)한다. 1999년 말레이시아 니파에서 치사율이 높은 니파 바이러스 감염 사태가 일어났다.
발단은 이렇다. 양돈업자들이 부수입을 얻기 위해 망고나무를 키웠다. 망고를 좋아하는 프테로푸스 박쥐가 몰려들었다. 니파 바이러스 숙주인 이 박쥐들이 망고를 즐기면서 흘린 오줌과 타액이 돼지를 통해 양돈업자들을 감염시켰다. ‘야생동물→가축→인간’으로 이어지는 감염의 연결고리는 자동차와 항공기 등 교통혁명을 만나면서 세계화의 길에 들어선 지 오래다.
네이선 울프는 9년 전에 이런 경고를 했다. “앞으로 우리는 팬데믹의 위협에 더욱 시달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병원체가 확산해 질병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열대 우림으로 들어가, 전에는 국제교통망과 단절돼 있던 병원체들과 접촉함에 따라 새로운 팬데믹이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다.”
이번에 세계인의 삶과 경제를 마비시킨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울프의 경고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아직 감염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코로나19는 사람이 불러들인 인재의 성격이 강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종래와 다른 점은 급속한 세계화로 세계인의 일상과 경제 활동을 순식간에 정지시키는 파괴력을 보였다는 데 있다. 특히 이번 경제 위기는 일부 지역에 제한됐던 과거의 위기와 달리 미국과 중국, 유로존 등 세계 전역의 경제를 냉각시켜 대공황을 넘어서는 ‘쓰나미급 충격’을 가져다주고 있다.
언제 이번 사태의 끝이 올지 불투명하다.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재확산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아니 앞으로도 야생동물과 인간의 거리가 계속 좁혀지면서 팬데믹이 빈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더욱 사실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 이후 ‘뉴 노멀’에서 ‘넥스트 노멀’로
“어떤 기관에는 단기적 생존만이 의제이다. 다른 기관들은 불확실성의 안개를 헤치며 위기가 지나가고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스스로 위치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고 있다. ‘정상 상태’가 어떨지 질문을 던져본다. 누구도 위기가 얼마나 지속할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앞으로 목격하게 될 것은 종전의 정상 상태와는 다를 것이다.”
현재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얘기지만, 이 말은 11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매켄지의 이안 데이비스가 한 말이다.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 경제는 저성장, 저물가, 저금리의 ‘악성 3저(低) 현상’에 빠져들었고, 우리는 이를 종래의 ‘정상’과 다른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정상)’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불러왔다.
코로나 19는 뉴 노멀조차 과거로 흘려보낼 듯하다. 세계의 판을 뒤흔든 큰 충격으로 우리의 삶과 경제는 종전과 같은 일상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은 이제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구분 선이 확연하게 그어질 전망이다. 매켄지는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넥스트 노멀(Next Normal)’로 명명했다. 경제와 사회 질서가 극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의약품·의료장비 비상 수급체제 구축해야
넥스트 노멀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현재 진행형 격변의 위기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먼저 앞으로 팬데믹은 방역의 차원을 넘어 국가안보의 이슈로 격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는 질병을 확산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경제와 사회 활동을 순식간에 중단시켜 국가적 위기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 공조보다는 각자도생이 만연된 세계에서 팬데믹은 국가안보 수호라는 측면에서 그 대비체제가 구축돼야 할 것이다. 특히 마스크 등 긴요한 의약품과 의료장비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면서 국내 비상 수급체계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향후 가시화될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넥스트 노멀은 '탈글로벌화'이다. 코로나19는 글로벌화의 심각한 위험요인을 부각시켰다. 각국이 공급체인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외부적 충격이 발생하면 경제에 어떤 비상벨이 울리는지를 절감하게 됐다.
실제로 IMF 분석을 보면 지난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0년 동안 국제무역 증가량의 73%는 공급체인 내의 거래로 나타났다. 각국 정부와 기업은 중국 등 해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일을 경제 안보 차원에서 강력하게 추진할 공산이 크다. 특히 미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품목의 국내 생산을 확대하고 중국 등 외국에 나가 있는 주요 기업들이 국내로 돌아오게 하는 '리쇼어링'을 강화하는 수순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과정에서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 두 개의 블록으로 디커플링하면서 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로 의존도가 높아 완전한 분리는 어렵겠지만 WTO체제 출범 이후의 세계 단일시장에 큰 균열이 생기고 이 과정에서 경제 신냉전이 가시화할 수 있다.
부채 버블과 인플레 등 부작용 우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온 경제 대혼란은 각국 정부가 정부의 곳간이든, 중앙은행의 돈줄이든 대폭 개방해 무제한 돈을 쏟아붓도록 했다. 당장 경제가 결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달려든 비상 대책이다. 지금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번에 헬리콥터로 뿌린 돈은 나중에 부채 버블과 인플레 등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또 이번에 금리를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내리고 정부 부채 수준도 한껏 올려놓아 다음번 위기 때 쓸 수 있는 정책의 탄환이 바닥난 것도 문제이다.
기업의 비즈니스 행태와 개인의 일상에도 '넥스트 노멀'의 변화가 예상된다. 기업들은 온라인이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비상 탈출구임을 체감한 만큼 온라인 쇼핑 등 비즈모델에 더욱 주력할 것이며 이는 이번 위기 상황 속에서 '언택트', 즉 비대면 온라인 소비를 적극 활용한 소비자의 수요 행태 변화와 잘 맞아떨어질 것이다.
기업들은 또 재택근무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해 스마트 워크 시스템을 구축하는 투자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재고 관리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실시간으로 재고 상황을 파악해 최소한으로 재소를 유지하는 전략에서 공급 충격에 대비해 적정 재고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개인의 경우에도 쇼핑과 교육 등 다양한 면에서 온라인 서비스의 소비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청천벽력같은 큰 위기를 경험한 만큼 만약의 리스크에 대비해 예비적 저축을 늘릴 가능성도 크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과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이번 팬데믹을 겪으며 그래도 우리가 확인한 것은 어려울 때 서로를 돕는 사회적 연대의 힘이다. 감염과 사망 위험을 무릎쓰고 환자에게 달려간 의료진, 사회적 거리두기에 자발적으로 협조한 성숙한 시민 의식.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서로 어깨를 기대는 연대 의식을 잃지 않는다면 넥스트 노멀이 반드시 잿빛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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