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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Oct 16. 2021

빈말이라도

짧은 웃음이 남긴 기분이 여자는 멋쩍었다. 그날 오전 일은 생각해보면 흔히 벌어지는 일이긴 했다. 그것은 모두가 부정하지만 누구나 인정해버린, 모르는 듯 아는 듯 약간씩은 발을 담그고 있는 모두의 게임일지 몰랐다. 어쩌면 그날 여자는 자신의 감정이 남자 때문에 유난스러웠던 건 아닌지 생각했다. 한편으론 그런 자신과는 달리 태연하게 운전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며 조금은 얄밉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는 거죠? 혼자만 안절부절 했다니까 배신감 들어요.” 여자가 물었다.


“그런가요?” 네비를 확인한 남자는 간선으로 빠지기 위해 깜빡이를 넣었다. 속도를 올려 차선을 바꾼 다음 그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누구나 느끼는 것이기도 하죠. 사람이 모이게 되면, 그게 뭐든 결정이 이뤄지는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때 각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니까요. 심지어 그게 꼬마들의 무리라도 말이에요. 우리가 사회성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도 여기에 있어요. 다만 그것이 드러난 것과 감춰진 것을 얼마나 연결 짓느냐에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죠.”


“제가 둔하다는 뜻이군요.” 여자가 대꾸했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둔하다기 보단 좀 더 테두리가 분명한 영역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디자인 같은, 자기 완결적인 특징이 큰 영역들요. 거기엔 외적인 요소들, 그러니까 관계를 통해 성취해 나가기보단 자신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이 중심에 놓여있으니까, 굳이 그런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잖아요. 생각을 하더라도 크게 의미부여를 않는 거죠. 게다가 전공이라는 것부터 이미 어느 정도는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자는 남자의 말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남자의 모습이 문득 영화 속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예쁘다거나 잘 짜인 구성 같아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들려오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말들 때문이었다. 마치 보색대비처럼 그것들은 서로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같은 일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난 들어본 적이 없는 걸요.” 여자가 말했다.


“이런 생각을 굳이 대화의 소재로 삼지 않으니까요. 제 경우엔 약간은 직업병일 수도 있겠네요.” 남자가 말했다.


“지금 진행 중인 업무전산화요? 시스템 업그레이드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요?” 여자가 물었다. 업무시스템 개선 소식을 들었을 때 경리과에 노후장비 예산도 책정되었는지 문의한 적이 있었다. 이번 개선 작업에는 소프트웨어 용역비만 예정되었다는 답을 들었었다.


“아뇨. 맞아요. 기존의 전자업무시스템에 좀 더 직관성을 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크다면 큰일일 수 있는데, 보이는 건 개선이지만 내부적으론 전혀 다른 시스템이거든요. 업무에 개입되는 모든 정보를 가공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려는 거죠.” 교차로 앞에서 차가 멈췄다. 남자의 음성이 한층 두터워졌다. “특히 조직의 구성과 의사결정과정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고려해서, 관리자와 실무자의 결정을 가능하면 객관화할 수 있도록 구상하는 일이에요. 여기엔 통계적인 관점에서 자동적 해석과 판단이 첨가돼요. 그것을 위한 구조를 짜고 수식을 만들고 A.I 같은 걸 끼워 넣는 거죠. 오늘 이곳도 비중 있는 거래처라 주문과 납품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수량과 재고를 확인하고 예측 가능하게 하는 게 목적이었거든요. 필요한 자료는 이미 검토했지만 실제 현장과 차이점은 항상 존재하니까요. 각각의 차이는 사소할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론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잘 예측되지 않는 일들이 꼭 생겨나죠. 그래서 부분적 시각과 전체적 시각이 쉽게 전환될 수 있도록...” 말하다 말고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았다. “지금 제가 너무 영업사원 같았나요?”


여자가 빙긋 웃었다. “글쎄요. 아마 아무 상관도 없는 제게 영업하는 거라면 아주 무능한 영업사원이겠죠?” 남자의 설명이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단 생각을 했지만 그녀는 그 점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충분히 설명하려 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차가 출발했다.


“그런가요?” 우회전하면서 같이 도는 남자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 직급이라면 고민할 문제들이긴 해요. 의사결정과정은 조금 전 말했었던 인간의 본성과 깊은 관련성이 있거든요. 그로 인해 조직체계 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에너지, 그것들은 생산성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해를 끼치기도 하니까.”


“회사 전체로 보면 확실히 능률이 오르겠지만, 저희 부서는 작은 조직이라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디자인실 직원은 인턴을 포함해도 5명으로 다른 부서의 팀원 정도의 규모였다. 여자의 직함도 공식적으론 실장이었지만, 내부적으론 여전히 과장으로 불렸다.


“아마 이진씨 부서는 앞으로 회사의 핵심부서가 될걸요. 작년에 개발팀에서 독립된 것도, 이진씨를 스카웃해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책임을 맡긴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대표님도 대단하세요. 은퇴를 고려해야 할 연세에 그런 고민을 하시다니.”


“그런 것까지 이야길 하세요?” 여자가 뜻밖이라는 듯 남자를 쳐다봤다.


“설마요. 조직 구성과 결재라인의 변화를 분석하다 보면 그 고민의 흔적들이 보이거든요. 감이에요. 꽤 신뢰성 있는 감.” 남자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직업병이라고 말한 거군요. 오늘 그 사장님 태도를 보고 왜 그런 생각들을 했는지도 조금은 알 거 같아요.” 여자가 말했다.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구성원들의 행동양식에 약간 민감해진 거 같긴 해요.” 남자가 말했다.


“순진하단 그 말. 저도 조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여자는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해는 마세요. 기분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게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감정적 표현이 아니란 것도 알겠어요.”


“그건 분명 과한 표현이었어요.” 단호한 어조로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 동의할 수 없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네?” 말뜻을 몰랐던 남자가 물었다.


잠깐 생각을 가다듬은 뒤에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는 거. 위아래를 정해서 잘 보이거나 억누른다는 그 말요. 인간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렇게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건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수 있겠지만, 설령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믿음 같은 걸...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걸 극복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는 편을 택할 거 같아요, 저는.” 여자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전방을 주시하는 남자의 시선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리석죠? 현실을 외면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인정하기 무서운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그래요.”


잠시 지면을 가르는 자동차 소음만 차 안을 메웠다. 그 소음을 밀어내듯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전혀 어리석지 않아요. 경향성이란 건, 그러니까 그런 통계적 관점은 개인의 가치를 가둘 수 없어요. 사람들이 그런 행동양식을 보인다는 말이 어떤 한 사람을 정확히 묘사하진 못해요. 제 말도 단지 통계적인 관점에 한정했을 때 유효한 정보일 뿐이에요. 사람이 가진 하나의 특징은 다른 수많은 특징들과의 균형에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일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평등주의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명령체계는 받아들이거든요. 이를테면 이진씨도 불합리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사장님의 입장을 받아들였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경쟁하는 여러 본능을 가진 모순된 존재예요. 그래서 곧잘 갈등에 빠지는 거죠. 그런 갈등 속에서도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이 드물게 있어요. 타인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아주 힘들죠. 그래서 이진씨 같은 분은 오히려 용기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용기 있다는 말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커다란 체구를 가진 억센 얼굴의 사내에게서 듣는 여자의 기분은 속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제가 용기 있다구요? 용기를 주려는 말은 아니구요?” 여자가 물었다.


그녀의 속마음을 몰랐던 남자는 더욱 진지한 말투로 답했다. “제가 굳이 용기를 드려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미 충분히 아셨다시피 제가 그래야 한다거나 동의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제 관점에선 그렇다는 거예요. 그건 굉장히 드문 용기예요.”


“왜요? 줄 수 도 있지. 난 그게 빈말이라도 좋아요.” 여자의 입술이 삐죽거렸다가 금방 미소로 바뀌었다.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란 걸 여자는 잘 알았다. 그냥 그런 거. 그 어느 쪽을 기대하거나 정하지 않는 것이 주는 편안함에 몸을 맡긴 채로 여자는 달려 나가는 차의 속도감을 느껴보았다.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자동차가 돌아나가자, 도로 왼쪽으로 이어지던 능성이 가라앉으며 좀 더 먼 하늘까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저 멀리 태양이 물들이는 붉은색 끝으로 자줏빛이 선명해졌다가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 Up On The Roof - Peter Cinco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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