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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Jun 24. 2023

햇살을 향하듯

“자, 선물.” 현관문이 열리자 불쑥 여자가 들고 있던 종이백을 내밀었다.


“갑자기?” 남자가 백을 받아 들자 여자가 입술을 내밀었다. 입을 맞춘 남자는 여자가 신발을 벗는 동안 여자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갑자기는 아니고 정해진 선물.” 여자가 거실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남자가 종이백을 살짝 들어 올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 지난번 그거?”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의자에 앉자 남자는 선채로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셔츠였다. 코발트색 줄무가 세로로 난 하얀 천이 네모 반듯하게 접혀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입고 있던 옷과 같은 문양이었다. 남자는 그대로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신기하다는 듯이 여자와 셔츠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여자의 두 눈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여자가 셔츠 양옆으로 찝어 둔 플라스틱 고정핀을 빼서 남자 쪽으로 밀었다. “입어봐.”


남자가 두 손으로 들어 올리자 셔츠가 아래로 부드럽게 펼쳐졌다. “그러니까 이걸 직접 만들었다는 거지.” 여전히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산 옷을 보는 것과는 기분부터 완전히 다른데.”


“입어보면 더 실감 날걸.” 여자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티는 벗고 입어야 해. 홑겹으로 입는 걸로 여유를 뒀거든.”


남자가 옷을 집어 들었다. “입고 나올게.”


“아냐. 그냥 여기서 입어도 돼.” 여자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말했다.


남자가 몸을 돌려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벗은 티를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남자가 셔츠 안으로 차례로 팔을 끼워 넣었다. 걸림 없이 들어가 몸에 감겨드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한번 힐끗 뒤돌아보았던 여자는 처음부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옷을 만드는 동안 그의 몸에 걸쳐질 상상으로 난데없이 설레는 기분이 들곤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직접 입는 것을 보게 되자 그 결과를 평가받는다는 생각에 여자는 살짝 긴장했다. 원래대로라면 시침을 놓고 한번 맞춰봐야 했지만 한 번에 놀라게 하고 싶었는 여자는 치수를 잰 뒤로 남자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셔츠의 단추가 거의 채워질 무렵 여자는 다시 몸을 돌렸다. 곧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요.”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돌아보자마자 여자의 긴장감은 언제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와, 예뻐.” 그 모습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델이 좋네.” 그녀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반음쯤 올라섰다.


“예쁘다는 말은 제발 좀...” 남자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남자를 한 바퀴 돌며 구석구석 옷매무새를 살폈다. “촉감은 괜찮아?”


“좋은데, 보기보다도 훨씬 부드러워.”


“한번 움직여볼래?”


남자가 팔을 들고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렇게 사이즈가 넉넉하지 않은 것 같은데 당기는 느낌이 없네. 굉장히 편해. 살에 닿는 촉감도 좋고.”


“린넨이라고 아마재질이라 지금 입기엔 딱 좋아. 구김걱정도 없고.”


“거울로 보고 싶은데.”


“그래.”


남자가 현관입구 쪽에 걸린 거울로 걸어가자 여자도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컵에 물을 따르는 동안,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춰보는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저절로 흐뭇한 표정이 지어졌다. “지난주 산 슬랙스랑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좀 있다 나갈 거니까 지금 입어볼래?”


“그럴까?”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마신 여자는 접시를 챙겨 다시 거실로 돌아와 앉았다. 가방 안에서 지난밤 구워둔 쿠키를 꺼내 접시에 담았다.  창 너머로 그제야 그날의 화창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하늘. 태양빛의 음영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구름의 부피감이 어느새 훌쩍 다가와 버린 계절의 정취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맞춤옷이라는 건가. 호사로군.” 방을 걸어 나오며 남자가 말했다. 연갈색의 바지와 까만 벨트 위로 적당하게 늘어진 셔츠 소매가 반쯤 걷어올려져 있었다.


“와. 예뻐. 예뻐.” 여자가 방긋 웃으며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그 말은 제발.” 남자가 웃으며 여자를 안아 올렸다. “예쁜 걸 어떡해.” 그대로 두 사람은 잠시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은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쿠키를 나눠 먹고 있었다.


“천의무봉이라. 문외한이 보기에도 박음질이 정교해 보이는 군.” 남자는 쿠키를 한입 베어 물고는 소매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자가 웃었다. “저, 저, 어르신 말투. 그런 말은 요즘 옷 만드는 사람도 안 쓴다구.”


남자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근데 맘이 편치는 않은데. 모르긴 해도 이거 만들려면 엄청 시간과 공이 들었을 거 아냐?”


“틈틈이 만든 거라 무리한 건 아냐. 시간에 쫓기는 경우만 아니라면 오히려 즐거운 일인 걸. 오랜만에 만드는 거라 좀 걱정했는데 선배가 입은 걸 보니까 나도 만족스러워.”


“근데 모양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네. 여긴 주름이 없는데 여기 카라는 있고, 또 이런 건 맞춰져 있고.” 남자가 허리라인과 카라에 난 박음질 라인을 만지며 말했다. 여자의 셔츠는 남자와 달리 허리선을 따라 주름선이 있는 반면, 카라가 없었지만 목 봉제라인을 따라 남자와 마찬가지로 군청색 박음질 라인이 둘러져 있었다.


“어머, 기뻐라. 말하지 않아도 의도를 알아주다니. 선배가 말했던 패턴의 변형은 디자인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나 할까. 같으면 재미가 없고 또 너무 다르면 조화로움이 없어. 여기 봐. 난 이렇게 리본을 만들었지롱.” 여자가 팔꿈치를 들어 보이자 소매 끝에 단추대신 매듭이 달려있었다.


“오호. 같으면 재미가 없고 너무 다르면 조화로움이 없다라... 멋진 표현인데?” 다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와 그녀의 옷을 번갈아 보던 남자가 눈썹을 모으고는 감탄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 단순히 옷이 아니라 어떤 미학적 성취를 입은 것이로군.”


“풋. 이제 안 거야?” 여자가 깔깔거렸다.


남자도 웃었다. 그때 귀를 울리던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던 그 순간, 남자는 어느 시구에서 보았던 ‘완벽한 순간’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창밖으로 부서지는 햇살 너머로, 정원 한켠 화창한 하늘로 기어오르는 호박넝쿨 끝으로 스쳐 지나는 바람을 따라, 그에게 주어진 오늘 이 시간이 그에게 기억하라는 듯이 생생하게 그녀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풍경 속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햇살을 향하는 덩굴손처럼 여자의 손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손길을 느낀 여자가 남자 쪽으로 손을 내밀자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 너라는 계절은 - 장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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