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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Oct 21. 2020

언젠가 서울을 떠나게 될까요?

재택근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는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이 단 한 번뿐이라면 나의 사랑은 뉴욕일 거라고 말한다. 뮤지엄과 영화관, 콘서트, 공원, 클럽, 그리고 수많은 레스토랑까지 즐거움이 즐비한 도시인 뉴욕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며 친구들 앞에서 고백한다. 


하지만 모든 연인이 사랑스러운 순간만 있는 게 아니듯 캐리 또한 뉴욕이 미운 순간도 있다.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러운 날씨, 좀처럼 잡기 힘든 택시, 이따금씩 마주치는 무례한 사람들은 캐리의 마음을 한 번씩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렇게 미운 마음이 들다가도 누군가 ‘뉴욕은 별로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듣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뉴욕을 격렬히 사랑한다.

 

캐리가 뉴욕을 사랑하듯 나 또한 서울을 사랑한다. 서울과 연애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간다. 어쩜 서울 태생이 아니라서 서울이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서울은 인싸 중에 인싸, 핵인싸다. 모두가 서울을 알고, 서울에 대해 이야기한다. 새로운 물건, 문화 ... 모든 새로운 것은 서울에게 가장 먼저 기회가 주어지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서울 주위로 사람들이 북적인다. 어릴 때 나에게 서울은 가까이하고 싶지만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 같았다. 언제 친해질 수 있을지 기회만 엿보았던 그런 친구.


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서울과 1년에 한두 번 보던 사이에서 어느덧 매일 얼굴을 보는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서울은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그런 친구였다. 높은 빌딩을 감싸며 화려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세월이 켜켜이 쌓인 골목들을 반대편으로 하나둘씩 꺼내어 정감 있는 모습을 비추는 등 만날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드러냈다. 골목의 수만큼 다양한 면과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렇게나 생동감 넘치는 이 도시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발견할 것이 많은 서울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서울을 떠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남자 친구와 연애하다 문득 '이 사람과 헤어지게 되는 날도 올까?'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잠시 동안 서울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머물던 때도 있었다. 3개월 정도 제주도에 머물렀는데, 서울살이에 신물이 났던 건 아니고 길을 잃고 방황하던 때라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고 싶었다. 우연하게 선택한 제주는 서울과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이며 흠뻑 빠져들게 했다. 제주도의 푸르름과 섬에서 경험하는 슬로 라이프가 좋아 이곳에 살아볼까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개월쯤 접어들었을 때부터 서울 생각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화려한 서울의 불빛도, 정갈하게 정돈된 서울의 거리도, 2분마다 탈 수 있던 지하철도, 서울에서 쉽게 즐기던 문화생활도, 서울 생활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져 이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때 나는 알았다. 잠시 다른 도시에서 지낼 수는 있어도 서울을 영영 떠날 수는 없겠다는 것을. 만약 서울을 떠나는 날이 있다면, 그건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일 거라고. 그 이후로 장기 여행을 떠난 것을 제외하고 오랫동안 서울에 자리를 비운 적은 없다.







그랬던 내가 서울 살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건 최근 완전히 바뀐 라이프 스타일 때문이다. 이직한 회사를 그만두고 얼떨결에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매일 회사로 출근하는 삶은 사라졌고, 스스로 정한 시간까지 거실 테이블로 출근을 하여 새롭게 만든 나의 패턴에 맞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 소속으로 일하던 것에서 프리랜서로 일의 패턴도 크게 바뀌었지만, 무엇보다 크게 와 닿은 건 재택근무가 가져온 시간의 효율성이다. 기상 시간부터 바뀌었다. 출근을 위해 메이크업하고 옷을 고르는 시간이 사라지자 1시간 잠을 더 잘 수 있게 된 것. 출퇴근하기 위한 이동 시간으로 적게는 1시간, 길게는 2시간을 길 위에 버렸는데 요즘엔 그 시간에 요가와 명상을 하고, 저녁에는 요리를 한다. 일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삶의 밀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자투리 시간 속에 내가 원하는 것을 촘촘히 채워 넣자 삶은 상상 이상으로 풍요로워졌다. 라이프 스타일이 변하자 다른 것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이런 삶이라면 서울에서 조금 벗어나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런던은 충만한 문화의 도시로 한 번쯤 살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도시에서 좋든 싫든 간에 모든 일이 정신없이 눈앞에 펼쳐져요. 자유를 만끽하기가 어렵습니다.
- 소피 윌슨, 매거진 <B> The Home 편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캐리가 뉴욕을 설명했듯이 서울 또한 뮤지엄과 공연장, 영화관 등을 지니고 있어 손쉽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으며, 다양한 레스토랑을 통해 세계 음식 여행을 할 수도 있다. 클럽과 공원이 공존하고 있어 원하는 것에 따라 상반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서울이다. 언제든 무엇과도 연결될 수 있어 편리한 것도 있지만, 또 필요 이상의 많은 것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만큼 삶이 복잡해지기도 했다. 도시에 살며 많은 것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많은 것에 정신이 분산되고 피곤해지기 일쑤였다.


런던을 벗어나 잉글랜드 동부 해안가에 인접한 펜랜드 지역에 위치한 크로랜드에서 교외 라이프를 즐기는 소피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자원이 한정된 교외에서의 삶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주저하지 않게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을 이겨내는 내면의 힘을 길러준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doing without)'는 정신을 자주 일깨워준다. 300년이 넘은 그의 집은 일부에만 전기가 들어와 매해 겨울을 나는 일이 가장 혹독하다. "도심 밖에서 사는 일은 이렇듯 절제와 단련을 필요로 합니다. 대신 삶은 가볍고 자유로워지죠." - 소피 윌슨, 매거진 <B> The Home 편



한 발자국 도심에서 벗어나면 편리함은 잃게 될지 몰라도, 삶은 더 간결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집의 크기부터 달라질 것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서울보다 훨씬 크고 좋은 위치에 집을 구할 수 있을 테니. 또 집의 주변 환경도 변하겠지. 빽빽한 건물과 교통 체증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 도시에서 살 때의 마음과 교외에서 살 때의 마음에는 확실히 다른 것들이 깃들 테다. 환경의 변화가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까지 가져올테니.


물론 이런 마음이 들었다 해도 당장 사는 곳을 바꾸지 않을 거다. 남편의 직장 문제, 나의 미래 커리어의 거취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여전히 서울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서 내키지 않다. 복잡하더라도 아직까진 도심의 많은 것과 연결되어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니. 하지만 예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한 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는 건, 다른 선택지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고, 언젠가 서울을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다는 것.


과연, 언젠가 서울을 떠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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