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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Jun 25. 2021

다시 돌아오는 힘

게으른 INFJ 이야기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안부 인사처럼 서로의 MBTI 물어보던 때가. MBTI 완전히 맹신하는  아니지만 8알파벳은 그동안 한마디로 정의 내릴  없었던 생각의 차이를 쉽고 간결하게 정리해줘, 한동안 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지표로 사용하곤 했다.


각종 SNS에는 MBTI 행동 양상에 대한 다양한 예시가 떠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재밌는 분류 하나를 발견했다. 계획형 인간인 J와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P에 관한 이야기로 분류 포인트가 남달랐다. J와 P에 부지런함과 게으름이 붙으면 또 다른 형태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생활양식에 따라 J와 P로 나눌 수 있지만 2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는 법. 세상엔 부지런함/게으름 외에도 다양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J와 P가 존재하기에.


위의 부지런함/게으름 조합을 보자면 나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실행력이 부족한 게으른 J. (참고로 나의 MBTI는 INFJ다) 아이러니한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계획 짤 때는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체계적인 사람인 것 같은데 딱 거기까지! 실행 단계에는 에너지가 못 미치는 부류다. 어쩌면 계획 단계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서 실행을 못 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게으른 J에게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 늘 망각한다는 점이다. 게으름 피울 미래의 나는 자꾸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며 늘 150~200% 계획을 세운다. 가끔은 계획표 속에 있는 완벽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자꾸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계획을 다 지키기만 한다면 세상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으니까. 그 벅찬 기분이 계획표 속에 환상적인 나를 계속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빗겨 나가지 않는다. 게으른 J가 그린 환상 속 자신의 모습 근처에도 못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처음 한두 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게으름뱅이가 어디 가겠어. 다음에 하지 뭐.'하고 가볍게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쓰러뜨리게 된다.


계획을 설계한 것도 나고,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도 나인데 번번이 화살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아.. 또 못했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나는. 게을러터져서는. 이러다가 나는 도태되고 말 거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스스로에 대한 미움과 경멸은 비수가 되어 꽂힌다. 나를 강하게 짓누르고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심각할 때는 수면 아래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 앞으로 나아가 보자고 세운 계획이 결국 내 발목을 잡아 악순환으로 이끄는 것. 게으른 J 유형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경험해봤을 테다.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던히 노력도 해봤을 거다. 차라리 계획을 세우지 말자고 다짐해보기도 했지만,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금방 방향을 잃어버리는 게 J의 성향이기에 그건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친구들과 함께 벌금을 걸고 실행해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다.


해결책을 찾은 건 최근 명상을 통해서다. 1년여 동안 명상을 하면서 자주 듣던 말이 있는데 최근에서야 마음속에 툭툭 걸리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던 말이 오랫동안 머무르며 계속 되뇌도록 했다. 그 문장은 명상의 기본 중의 기본인 문장이다.



괜찮아요. 다시 돌아오면 돼요.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 순간으로 돌아오세요.


명상하는 이유야 많겠지만, 결국 하나를 위한 행위로 집결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호흡을 가다듬으며 순간에 집중하다 보면 불안감도, 복잡한 생각도 사라지고, 집중력도 높아진다. 하지만 집중하는 게 절대 쉽지 않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찾아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생각의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점심은 뭐 먹지?', '어제 친구가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 '오늘 오후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등 과거 또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로 생각이 넘나든다.


누구나 그렇다. 생각은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시도 때도 없이 시공간을 넘나든다. 또 생각은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반대로 더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지금 또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있나요. 괜찮아요. 자꾸 생각이 드는 건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럴 땐 다시 돌아오면 돼요. 다시 이 순간으로 나를 데려오세요."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막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계속 생각이 이리저리 뻗어 나가도 다시 돌아오면 된다. 그 힘을 기르는 게 명상이다.


명상에서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생각’이라면, 게으른 J에게는 ‘실행력’ 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내가 모든 걸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내일의 나에게 얼마만큼의 실행력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통제하지 못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 정해둔 계획을 다 지키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돌아와 또다시 하면 된다. 계획표의 절반에도 못 미칠지라도,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했을지라도 무언가는 남을 것이다. 돌아온 만큼 조금씩 쌓이고 쌓여 결과물을 안겨줄 것이다.


  

이실직고하자면 이 글의 업로드 날짜는 20일이었다. 스스로가 정한 마감 날짜는 그랬다. 하지만 게으른 J가 어디 가겠는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읽고 있던 책을 놓을 수가 없어서, 졸려서 등 여러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오늘에 다다랐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고 결국 글을 완성했다. 정해진 기한은 지키지 못했지만, 미완성으로 서랍 속에 방치해둔 것은 막았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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