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 염색체의 반란

손가락 포인팅에 감탄하는 이유

by 채플힐달봉

특수교사로 일하고 있는 동갑내기 시누이가 첫 조카인 선율이의 발달과정을 지켜보면서 혼잣말처럼 감탄했던 것이 떠오른다.

“아기가 검지손가락으로 정확하게 물건을 가리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 우리 반 아이들은 누구도 저걸 못 하거든.”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연하다 ‘고 여기는 것들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적이요, 신비라는 것을 시누이의 스쳐가는 말속에서 깨달았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매일 교실에서 씨름하며 피부를 맞대는 시누이는 내가 살아가는 일반의 세계와는 다른 바운더리,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시선을 가졌다.

그녀가 교실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저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혹은 동정으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경청했었는데 그 세계로 내가 들어가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딱 검지 손가락 하나만 펴서 물건을 가리키는 행위, 그뿐이랴. 아이가 정상적인 발달곡선을 따라 앉고 걷고 뛰는 것, 스스로 물을 마시는 것, 물건의 제자리가 어디인지 기억해 내는 것, 열거하자면 끝도 없는 그 ’ 당연한’ 행위들이 실은 모두 다 기적인 것이다.



작년 봄학기에 해부생리학(Anatomy and Physiology) 수업을 수강했다. 사람의 신체가 얼마나 정교하고 기가 막히게 질서 정연한지 매 수업시간마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세포들 하나하나가 제 기능을 충성되게 수행하고 프로그램된 목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서로 협력하기도, 배척하기도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몸속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고 그 전투의 승리로 우리의 몸이 보호되며 나이에 맞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쩌다, 정말 우연히,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느 순간에, DNA에 변이가 일어나면 프로그램된 세포들이 제 길을 잃고 영구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화음이는 15번 염색체에 변이가 일어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염색체의 단지 조그마한 일부가 손실됐을 뿐인데, 검지 손가락을 펴는 것, 앉고 걷고 뛰는 것, 기억하는 것, 스스로 화장실을 가는 것 등 모든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정상적인 성장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었던 가를 매일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이 삶은, 고통과 감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삶이다.



아침에 멀쩡히 식사를 끝내고 학교 갈 준비를 하던 화음이가 돌연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순간, 내 몸의 혈액이 뇌로 몰리면서 아침의 졸음을 몰아내고 각성된다. 구토를 일으킨 원인을 찾기 위해 아이 주변을 살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구토 후에 느껴지는 메스꺼움으로 악악 소리 지르며 울어댈 뿐,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에게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아침으로 먹은 미역국이 문제였던 것일까, 가지고 놀던 실 꿰기 장난감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손가락을 물어뜯다가 사레가 든 것일까. 알 도리가 없다.

토사물을 정리하고 울어대는 아이를 씻긴 후, 학교 선생님께 오늘은 집에서 쉬겠다는 연락을 했다.

그렇게 하루를 쉬고 나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지난밤에 자는 사이, 속이 불편했던 화음이가 설사를 싸질렀다. 기저귀에서 터져 나온 설사가 온 이불을 더럽히고 침대 매트리스에까지 스며들었다.

그런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 악,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내 몸의 혈액들이 다시 한번 대동단결하여 뇌로 모여들고 세포들이 일사불란하게 이 위기의 상황에 맞는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화음이와 12년을 살아오면서 위기대처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었다.

인간은 참으로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다. 아직 아침 해가 밝지 않은 새벽 4시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그 와중에도 출근해야 하는 남편과 등교해야 하는 11학년 수험생을 의식해서 문을 꼭꼭 닫고 그 모든 일을 수행했다. 스스로 대견하다.

그렇게 기진한 나는 설사로 속을 비운, 샤워로 몸까지 깨끗해진 화음이와 드르렁드르렁 아침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온 집이 조용하다.

남편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유부초밥 도시락이 식탁에 그대로 남아있기에 문자를 보냈다.


“오빠 가져가라고 도시락 싸 뒀는데 말을 못 했네.”

“아니야, 알고 있었는데 너 일어나면 먹으라고 그냥 두고 왔어. 라면 먹지 말고 그거 먹어. “


그의 배려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세탁기가 하루 종일 돌아간다. 건조기에서 나온 이불들을 하나 둘 집안 곳곳에 펼쳐 건조기에서 미처 다 빠지지 않은 물기를 말린다. 온 집안이 섬유유연제 냄새로 가득 찼다.

새벽의 지독스러운 설사의 자연 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연을 본떠 만든 인공의 향기가 아침의 일은 이미 다 지나갔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모든 해프닝이 15번 염색체의 미세한 손실로 일어난 일이다.

나는 다시 한번, 정상적인 발달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한 일인지 뼈저리게 체험하며 나를 둘러싼 세계의 바운더리를 한 뼘 더 넓혀간다.


*제목에 쓰인 이미지 출처 : https://babybilly.co/en/post/1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