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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과 만년필 Aug 01. 2023

응 잘 안 해

벤치에서 들린 이야기


이제는 거의 완치 단계에 이르렀지만 몇 달 동안 돌발성 난청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한창 귀앓이가 심했던 5월에는 일상적인 소음들도 견디기 힘들었다. 주말에 집에서 세탁기 돌리는 소리마저 힘들게 느껴져 집을 나서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다니며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다. 조용할 줄 알았던 아파트 뒷 쪽에 있던 작은 놀이터에는 아이들 몇몇 이서 신나게 놀고 있어 적당하지 않았고 마땅한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내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상가 옆 벤치에 다리도 쉴 겸 앉아보았다. 차가 다니는 도로변이었지만 귀가 견딜만했다. 트인 곳이라 소리가 반사되지 않고 멀리 퍼져나가는 것 같았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생활소음들이 서로 부딪히며 상쇄되는 느낌도 들었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운 음파의 간섭현상 같은 개념들이 쓸데없이 생각났다. 의외의 곳이 나에게 편안한 곳이었고 가방 속에 있던 책을 꺼내 청승맞게 읽고 있었다.


주말에 상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주민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책에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린 딸과 어머니가 얘기를 나누며 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묻고 엄마는 답하는 전형적인 대여섯 살 딸과 엄마의 대화였다. 내가 앉은 벤치 앞을 지날 때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엄마, 나도 나중에 결혼해?”

“하겠지?”

“그런데 엄마, 여자랑 여자랑 결혼할 수 있어?”


들려오는 소리를 별생각 없이 흘려듣다가 이 대목에서 엄마의 대답이 궁금해져 귀가 쫑긋해졌다.


서너 걸음 정도 걷는 동안 엄마는 말을 멈췄고 나는 엄마가 너무 멀리서 대답을 하면 어떡하지 하며 약간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 엄마가 말했다.


“잘 안 해”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젊은 엄마의 뒷모습이 우러러 보였다.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질문한 사람이나 답변한 사람을 모두 편안하게 만든 그 답변에 감탄하며 그 대화를 얼른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했다.


현명한 답은 내용도 중요하고 타이밍도 중요하고, 그리고 묻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가장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도 조금 더 현명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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