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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카페 "노을"

'무.영.지' 5화 강물 위에 음악처럼 흐르는 사랑의 눈빛과 말

by 권영랑 Garden Planting Designer

음악을 끄니 창문 넘어 풀벌레의 길고 고운 합창이 한창이다.

일제히 길게 소리를 뽑아낸 후 훅 멈추고

정적이 흐른다.

풀들이 흔들리며 사각이는 소리로 화답한다.

다시 길고 요란한 합창,

또 정적, 가만히 풀잎이 흔들리는 모양을 바라보다, 문득

'저 여린 소리에 벌레들이 간간이 합창을 멈추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틀어 놓은 음악이 너무 커서 껐더니,

풀벌레의 갖은소리와 풀잎 흔들리는 소리가 더 크고 많은 소리로 들려온다

야단 법석이다.

마치 곁에 없는 그리운 이가 더 가득히 내 삶에 들어와 앉은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길에 들어선 풀밭의 햇살이 노곤하다.

차를 몰고 강변길을 달려 어디서든 그와 함께 바라본 강물과 이 가을을 하염없이 느껴보고 싶다.

그와 함께 했던 강가 추억의 첫 장소가 되어준 카페 "노을"이 불쑥 가슴에 밀고 들어온다.


그에게서 온 두 번째 편지를 읽다 말고 성급히 전화를 걸어

"강변 카페 <노을>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라고 말한 그곳은 강북 강변로를 타고 한강 하구로

달려가는 길, 마포와 여의도 사이 밤섬을 바라보는 건물 9층에 있었다.

이른 아침엔 밤섬을 가득덮은 안개와 일출의 긴 불 칼을 볼 수 있는 곳

늦은 오후에서 저녁까지, 햇살이 길게 강물에 누워 서해 바다로 내달리는 곳이다.


처음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그를 만날 때 나는 그와 어떤 음식을 시키고

어떤 음료를 마실 것이고 마셨는지가 하얗게 기억에 없었다.

두 번째 긴 편지 끝에 그를 만나기로 한 뒤 그를 만난 후에도 나는 그 레스토랑에서

어떤 음식과 음료를 마셨는지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그의 동그란 눈과 낮은 톤의 말과 길고 흰 손가락 뿐 이었다.

아주 신기하게도 나는 그를 만나기 전의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히 기억한다.

마치 얼굴에 뽀얀 솜털이 새로 나온 듯 화사해지고, 와인 두어 잔쯤 마신 듯한 발그레한 볼

그날도 문 앞에 서서 들어가기 전의 내 모습은 평상시의 내 모습이 아닌 듯했다.


그 당시 나는 사회에서 자릴 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조바심을 치던,

아직 서툴고 자신 없고 뒤쳐지는 듯한 모든 업무로 자주 상심하고,

다시 의지를 모아 없는 희망을 만들며 기를 쓰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인 미완의 30 초반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나면 후회가 더 많이 밀려들고, 사회는 냉혹하고, 내 실력도 하나도 없는 듯 보이고, 실제 별것 아닌 학력과 배경으로 사회생활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던 때였다.

하지만, 4명의 오빠 48살에 나를 낳은 아버지 덕분에 남자는 다 내게 호의적일 것이라는 착각과

원하는 것은 언제나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만이 뱃속깊이 깔려있어

뭐든지 열심히 한다고, 뭐든지 잘해 낼 것이라는 의욕만 가득해 딱 사고 치기 좋은 위험한 상태였다.

게다가 동시대 열심히 교육받던 현모양처보다는 자유인을 꿈꾸는 근본 없는 모순 덩어리였었다.


내 그런 삶의 어느 날 저녁, 놓친 셔틀버스 때문에 그가 훅 들어와 앉게 되었다.


< 카페 노을 6시 30분, 8월>은 하늘에서 짱짱하던 햇살이 딱 기운 빼고 내려서며

강물에 하나씩 옷자락을 벗어 담글 때이다.

조금씩 명암을 달리하는 도심 건물 들과 강가의 풀숲과 나무사이 어둠으로 강물은 더 밝게 빛나고,

그 넓고 긴 몸을 늘어지게 눕히며, 심연을 모를 듯한 황금빛 물결속으로

거대한 서울 하루의 소란함을 다 녹여내는 시간이다.


강변 카페 노을은 그 힘 뺀 햇살의 황금빛 손길에서

붉게 온땅을 물들이는 태양의 마지막 산화,

그 열정에 지쳐 모두 사라져 버린

텅빈 하늘의 검푸른 어둠까지,

매일 영화처럼 낭만사건을 찍어내는 로맨틱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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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로 내달리는 강물과 노을


문을 연 순간 그의 환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입가에 조금 잡히는 주름에 황금빛 햇살이 비추며

그를 더 여유 있는 신사로 후광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얼굴은 미소로 반기지만 무척 설레는 듯 상기된, 익숙하지 않은 듯 세심한 조심성이

몸짓에 드러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옆으로 나와 서며 맞이해 주었고

내가 그의 반대편 의자에 앉도록 의자를 조금 움직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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