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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A Sep 30. 2016

천사의 눈을 가진 아이, 이이퓨

미얀마 바간 (July 2012)

미얀마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회사원으로 살았던 마지막 해에 유독 심했던 스트레스와 고민 속에서 향한 곳이었고 무려 2년 만의 휴가였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의 이유는 충분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곳에서 한 명의 천사를 만남으로 해서 행복은 배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며 괜스레 모든 것이 슬퍼져 눈물을 흘리던 나는 미얀마를 떠나면서 평온해졌다.

사실 처음 미얀마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호기심이 대부분이었다. 사방으로 뻗친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가 한 문화권인 요즘 시대를 생각하면 휴대폰 자동 로밍이 되지 않는 나라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하루빨리 가보고픈 곳이 되었다. 아직 여행자들에게 완벽하게 친절히 모두 개방된 나라가 아니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여전히 치열하게 군부세력과 싸우고 있지만 노벨평화상을 받은 여성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의 나라이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미얀마의 관광수입의 대부분이 지역주민이 아니라 군사독재 정부로 흘러가기 때문에 완전히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여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측도 있지만, 외국인 여행자들이 미얀마 현재의 문제점을 마주하고 그들의 눈을 통하여 세계적인 이슈로 재등장시켜 군사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경우에는 무조건 지역주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으로 미얀마 여행의 원칙을 정했다.  


미얀마를 여행했을 때는 여름의 한 복판, 우기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하루 종일 비가 마구 쏟아져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여행에 목말랐던 나는 미얀마의 낯선 공기 속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미얀마 여행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아침 무렵 양곤 공항에 첫 발을 디뎠다. 그런데 무언가 공항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심상치 않았고 입국심사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너무 궁금했는데, 영어로 잘 소통되는 사람이 없었다. 내 질문을 이해하고도 그들이 하는 말을 내가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하기를 몇 번, 결국 난 이 소동의 원인을 알아냈다.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가 곧 도착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아웅산 수치를 만났던 양곤 공항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가 지금 공항에 온다고요?”

나는 웅성웅성 모여든 사람들에게 몇 번을 확인했다. 실제로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자로 선정된 그녀였지만, 정치적 탄압으로 인하여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21년이 지난 2012년에서야 직접 노벨평화상을 받아 들고 미얀마로 귀국하는 길이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낯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버마 민주화의 어머니’를 마주치게 되다니. 쉽게 오지 않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빽빽이 공항 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미얀마의 최대 야당) 사람들 틈바구니에 아예 자리를 깔았다. 

한 정치적 지도자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놀라고, 그들은 낯선 외국인이 자신들과 동일한 행렬에 끼여 있다는 것이 신기했나 보다. 서로를 슬쩍슬쩍 쳐다보며 어색한 미소만 띠고 있을 때, 자신 있게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어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아, 한국. 드라마 많이 봤어요.”

“한국 드라마가 인기 많은가 봐요. 신기해요.

“인기 굉장히 많죠. 그런데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를 알아요?”

“그럼요. 세계적인 지도자이자 민주화의 상징인데 모를 리가 있나요. 게다가 저도 같은 아시아인이잖아요.”

나에게는 낯선 나라였던 미얀마가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로 인하여 가깝게 느껴지고, 그들에게는 먼 나라였던 한국이 드라마를 통하여 익숙해졌던가 보다. 그렇게 공항 한 구석에서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새 나와 아주머니 친구들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모두들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간단한 밥을 사 와서는 나에게 먼저 내밀었다. 

“아가씨, 이것 좀 먹어봐요.”

“아니에요. 전 괜찮으니 많이들 드세요.”

“당신 것까지 사 왔으니 얼른 먹어봐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 있는 건데 점심도 못 먹고 배고플 거 같은데….”

“아…. 그럼 감사하게 잘 먹겠습니다.”

몇 시간째 기다리느라 살짝 지칠 것도 같았는데, 애정이 듬뿍 담긴 밥을 먹고는 금세 되살아났다. 그러자 이제는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입소문을 타고 한 외국인이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는지 미얀마 TV와 라디오에서 나왔다며 나에게 인터뷰를 부탁해 왔다.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요청하는 인터뷰를 모두 다 하고 나서야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남은 수다를 풀었다. 

3시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가 탄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긴 시간을 함께 해 주었던 친구들은 내 자리를 지켜 주었고, 잘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모습을 드러낸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순식간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비록 멀긴 했지만, 나는 환하게 미소 짓는 아웅산 수치 Aung San Suu Kyi를 만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을 생각나게 하는 열광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미얀마 입성을 축하하는 듯하여 발걸음이 날아갈 듯했다. 공항을 나서기도 전에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음에 감사했다. 

‘진짜 여행의 시작이구나!’

여행의 맛을 느끼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달콤하게 전해져 왔다. 미얀마의 첫인상은 완벽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서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 속에서 끊임없이 느껴지던 따뜻한 마음들. 미얀마는 나에게 무조건 사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내가 느낀 첫인상에 걸맞게 미얀마는 어느 곳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여행의 중반쯤 불탑의 도시 바간(Bagan)으로 향하게 되었다. 바간에 도착해서 이틀 간은 이 찬란한 불교 유적지의 매력에 빠져 하염없이 올드 바간을 걷고 또 걸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 버마족 바간왕조의 수도였던 이 곳에 5,000여 개의 탑과 사원을 세웠고, 아직도 약 2,300여 개의 탑과 사원이 남겨져 있다. 동서남북을 아무리 둘러봐도 끝이 없는 들판 위에 끝이 없이 서 있는 탑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대인들의 전설과 신화가 들려오는 것도 같고, 문득 인생무상의 경지에 오른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탑의 기운에 홀려 이틀을 꼬박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탑의 평원의 가운데에 서거나 앉거나 혹은 또 누워서 먼지가 되어 버린 내 몸과 마음을 둥둥 떠다니게 내버려 두었다. 

올드 바간의 풍경

그러고 났더니 어느 순간 불현듯 다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먼지가 되어 불탑의 상공을 부유하듯 날아만 다녀도 그만이려니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은데, 아직 나는 세상에 미련 많은 욕심 많은 중생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그래서 바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시장으로 향했다. 가벼워진 내 몸과 마음에 사람 냄새를 가득 채우고 싶었다. 원래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시장 구경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미얀마에 와서 하는 첫 시장 구경이었기에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워낙 천부적인 길치에 방향치이기도 하지만 시장도 꽤 규모가 컸던지 나도 모르게 어느새 길을 잃었고, 시장 밖으로 나왔을 때는 도무지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고, 급할 것도 없는 여행길이라 길을 잃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저 한 마디면 만사형통이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길을 찾는 것은 오늘 하루가 저물었을 때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한 번만 노력하면 될 일이다. 내가 빠져나온 시장 뒤 편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내가 묵고 있었던 숙소 거리는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저가의 숙소와 여행자들을 위한 가게들이 많은 곳이어서 진짜 현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게 되어 오히려 기뻐했었다.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리며 동네 골목골목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마을은 시장보다도 더 나로 하여금 사람 냄새를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골목마다 흙놀이를 하며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 얕게 흐르는 개울물에 머리를 감거나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까지. 세상 어디나 똑같은 사람 사는 모습이었다. 다만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나무로 지어진 이층 집들과 쓰레기에 오염된 물이 마을의 젖줄이 되어버린 모습처럼 못내 안타까운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거진 다 돌아보았을까. 언제부터인지 내 뒤를 졸졸 따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난 뒤를 돌아보며 한 번 씨익 웃어주었다. 그때 소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솰라 솰라 솰라~”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는데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마켓, 마켓. 히얼 노 마켓.”

“아, 여기는 시장 아니라는 말이구나. 난 마을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야.”

바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올드 바간의 문화유적을 즐기거나 기껏 마을에 들어와도 시장에만 들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외국인 여행자가 마을 안에서 길을 헤매는 것으로 생각했었던가 보다. 시장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는 제스처였다. 마을을 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한참 만에야 이해시키고 났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이는 이 소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앞장서 갔다. 한 집 앞에 다다라서 자신과 그 집을 가리키며 자신의 집이라고 소개했다. 

“아, 여기가 너희 집이구나. 너희 집에 나를 초대해 주는 거야?”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손을 이끌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이퓨네 집에도 구준표가 있다!

“난 한국에서 온 승애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이이퓨.”

“이이퓨, 만나서 반가워. 그리고 초대해줘서 고마워.”

겨우 통성명을 끝낸 소녀가 나를 이끌어 가리킨 곳에는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 얼굴이 인쇄되어 붙여져 있었다. 

“한국 드라마가 정말 인기 있나 보다. 코리안 드라마 굿?"

“굿, 굿!”

한 마디를 소통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지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드라마 이야기를 한참 하다 보니, 점심때가 다 되어갔다. 내색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이퓨는 밥 먹는 시늉을 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밥상을 차려 내놓았다. 소박하지만 감사하고 정이 듬뿍 담긴 밥상이었다. 그렇게 또 이이퓨와 나는 식구(食口)가 되었다. 

그때, 이이퓨의 엄마가 돌아왔다. 시장에 내다 팔 밤 같은 열매를 잔뜩 들고 왔다. 엄마도 영어 단어 몇 개 밖에 할 줄 몰라 여전히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마당에서 열매를 삶는 엄마 옆에 앉아 이이퓨와 나는 시간을 보냈다. 

“이거 먹어봐. 내가 시장에서 파는 거야.”

엄마가 내어 주는 삶은 열매는 모양도, 맛도 꼭 우리나라의 밤 같았다. 맛있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니 끊임없이 내 입으로 하나씩 밀어 넣어주었다. 

“이러다가 내가 다 먹고 시장에서 팔 게 하나도 없겠어요.”

“오늘 우리 집에서 놀다가 저녁식사까지 하고 가.”

엄마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집에 그대로 있으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고는 다 삶아진 열매 소쿠리를 들고 다시 시장으로 나갔다. 이이퓨는 나에게 저녁까지 있을 거냐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근사한 초대를 받고 따뜻한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 감사해 나도 이대로 받을 수만은 없었다. 

“이이퓨, 내가 볼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숙소에 갔다가 이따 저녁시간에 다시 올게. 괜찮지?”

“그럼 내가 숙소까지 바래다 줄게. 또 길 잃으면 어떡해.”

“그런가? 그럼 숙소까지는 조금 머니까 시장 입구의 큰길까지만 부탁할게.”

이이퓨는 내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나의 가이드를 자처했고, 덕분에 나는 무사히 눈에 익은 큰길까지 나올 수 있었다. 

“저녁때 6시쯤 올 수 있어?”

“응, 시간 맞춰서 갈게. 이따 보자, 이이퓨.”

엄마 빡빡과 이이퓨


잠깐의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바로 나는 다시 시장으로 달려갔다. 손으로 직접 짜 만든 커다랗고 예쁜 바구니를 하나 사고, 그 바구니 안을 갖가지 과일로 채웠다. 짧은 휴가라고 미처 선물할 것을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나 과일로라도 내 마음을 전할 생각이었다. 내 나름의 선물을 준비해 놓고, 낮 동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고서 숙소를 막 나설 때였다. 숙소 문 앞에 낯익은 그림자가 보였다.

“이이퓨, 너 여기서 뭐해? 설마 나 기다리고 있었어?”

“응. 우리 집 못 찾아올까 봐 데리러 왔어.”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어쨌든 고마워. 왔으면 부르지….”

괜히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이이퓨와 손을 꼭 잡고 다시 이이퓨의 집으로 향했다. 이이퓨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외국인 손님이 온다고 들썩였다. 도착한 이이퓨네 집 마당에도 동네 사람들이 잔뜩 와 있었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환대를 받을 수 있을까? 다시 찾은 집에는 온 가족들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알고 보니 대가족이라서 한 명, 한 명 인사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엄마 빡빡은 나만을 위해 너무나 과분한 밥상을 차려 주었고,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어린 동생들이 근처로 얼씬도 못하게 엄포를 놓았다. 게다가 이이퓨는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골고루 먹어보라며 반찬을 놓아주고, 모기에 물리지나 않을까 끊임없이 부채질을 해주고, 입 닦으라며 화장지를 접어주었다. 그 밥을 먹으면서 함께 배 안을 채우는 따뜻한 기운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들이 나를 언제부터 알았다고, 내가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라고,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걸까. 나에게는 이만큼 베풀어주고도 내가 가져온 초라한 과일 바구니는 아주 조금만 꺼내고는 다시 나에게 나머지를 챙겨 가라며 성화다. 

이이퓨네 집에서 대접받은 저녁식사

이 가족은 그들이 나에게 내어준 한 끼의 밥상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밥상이 고작 그냥 밥상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함께 얹혀있어 얼마나 나를 따뜻하게 했는지 알 수 있을까?

감동의 저녁 시간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해는 져서 금방 어두워졌고,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도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해야 했다. 

“이이퓨, 오늘 너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어. 너희 집에 초대해줘서 정말 감사해. 그리고 가족들 모두 따뜻하게 맞아줘서 감사해.”

“승애, 내일 또 우리 집에 올래?”

“내일은 아침 일찍 양곤으로 떠나.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나도 너희 집에 오고 싶지만 미안해.”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조심해서 돌아가길 바라.”

못내 아쉬운 표정이 역력한 이이퓨는 집을 나서는 나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이것 저것 찾아서 내 가방을 열어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건 내 선물이야.”

“선물이라니. 이이퓨, 네 가족에게서는 이미 너무 큰 선물을 받았어. 더는 필요 없어.”

“아니야. 꼭 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 가지고 가서 볼 때마다 내 생각해줘.”

“고맙고 미안해서 어떡해. 나만 너무 많은걸 받고 가서 어떡해.”

“그럼 다음엔 네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와.”

“좋아! 그리고 이이퓨 가족도 모두 한국에 놀러 와.”

좋다며 이이 퓨가 환히 웃었다. 이런 말들이 모두 현실이 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몇 번을 뒤돌아보며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힘겨운 발걸음을 떼어 숙소로 돌아왔다. 


내 가방 한가득 이이퓨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타나카(Thanakha, 미얀마 여인들의 천연화장품), 타나카를 갈아서 쓰는 도구들, 타나카 나무로 만든 빗,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챙겨 넣어준 미얀마의 전통 복장인 붉은색 론지(Longyi, 통치마)까지.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여행을 하면서 내 눈물이 마를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다. 매번 받으면서도 아직까지는 사람에게 받는 감동이 몸서리쳐지게 행복해서 아마도 당분간은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 같다.

선물받은 론지를 입고서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 동안 나누었던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소통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이해한 그들의 말이 정확히 맞는 건지 확신도 없다. 그들이 내 감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래도 나는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때 나눈 것은 단지 말이 아니었음을.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때 분명히 우리는 같은 마음을 나누었음을. 

이이퓨의 가족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부서질 듯한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더러운 물에 몸을 씻고 빨래를 한다고 해서 내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 열어 진심으로 대해주고, 아낌없이 다 내어준 적이 있었던가. 마지막으로 모르는 이에게 먼저 다가가 웃어주고,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어 본 적은 언제였던가. 이이퓨와의 만남을 통하여 나는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나도 그들처럼 사람을 대하는 맑은 마음을 갖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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