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A Sep 21. 2016

사랑스러운 부부의 포근한 신혼집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April 2004)

영국에 와서 첫 해외생활에 적응하고 공부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난생처음 주어진 2주간의 부활절 방학에 갑자기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영국에 오기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Scotland) 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왠지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향수 같은 느낌이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낡은 것보다는 새 것을 더 좋아하고 여전히 개발하는 데에 집중하는 우리나라의 대도시에 살다 보니 내가 지내는 런던도 꽤나 오래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에 대한 이미지는 그것보다 훨씬 진한 향기를 뿜어댔다. 그래서 나는 대략 일주일 간의 계획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Edinburgh)로 향했다. 


스코틀랜드, 특히 에든버러는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물론 영화 <트레인스포팅 Trainspotting>에서 이완 맥그리거 Ewan McGregor가 미친 듯이 질주했던 프린세스 스트리트(Princess St.)나 신시가지를 보면 그곳도 어쩔 수 없이 비슷비슷한 대도시의 모습으로 무표정하게 서있지만, 내가 열 번도 넘게 왕복했던 로열 마일(Royal mile)은 내 머리 속 스코틀랜드를 실현하기에 어울리도록 더없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글라스고(Glasgow)에서 마주한 찰스 레니 매킨토시 Charles Rennie Mackintosh의 예술 세계에 취하고 스코틀랜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랜드(Highlands)를 차를 타고 돌면서 무한하고 감동적인 자연 속에서 전설 속의 네시 Nessie까지 만나고 오니 스코틀랜드 여행은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이제 에든버러에서의 마지막 하루 밤만이 남았다. 


하이랜드에서 돌아오자 점심시간을 넘긴 오후였다. 나는 한국에서 울버햄튼(Wolverhampton)으로 교환학생으로 온 B와 함께 여행 중이었고, 영국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하루나 Haruna와 제인 Jane까지 글라스고에서 합류하여 4명이서 하루 밤 묵을 숙소를 찾아야 했다. 그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여름이 점점 다가오면서 해가 길어져 늦은 시간까지 환했고, 내일 아침 일찍 런던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별다른 조건 없이 하루 밤 잠만 자면 되는 숙소를 구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안일함은 부활절 휴일을 가볍게 여긴 탓이었다. 매년 열리는 밀리터리 타투 Military Tatoo 축제를 제외하면 에든버러에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시기가 부활절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몇 군데 호스텔을 두드려 봤지만 우리가 묵을 수 있는 빈자리는 없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급히 문을 닫기 전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렀다. 

“오늘 하루 밤 묵을 호스텔을 찾고 있는데요. 가격이 너무 비싼 호텔은 말고요. 추천해줄 만한 곳이 있나요?”

“여기 두 군데를 알려 드릴게요. 지도와 주소를 줄 테니 찾아가 보세요.”

그렇게 인포메이션 센터를 통해 쉽게 정보를 얻어내고는 괜히 고생하며 다녔다며 마지막 힘을 냈다. 사실 하이랜드에서 돌아온 이후로 3시간 넘게 헤매고 다니던 터였다. 어깨에 짊 어맨 10kg이 넘는 배낭이 온몸을 짓누르기 전 빨리 숙소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쉽사리 우리에게 행운을 안겨주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밖에 할 수 없도록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준 호스텔 정보는 엉터리였던 것이다. 지도를 확인해보고, 주소를 두세 번 확인했지만 틀림없는 그 자리에 호스텔은 없었다. 이해할 수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미 길바닥에서 걷고 또 걸어 숙소 찾는 데에만 5시간을 소비하고 있었고, 이미 배낭이 내 몸인지, 내 몸이 배낭인지 알 수 없게 일체화된 짐덩어리에 위축되고 짓눌리고 있었다. 때마침 해도 지고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그냥 버스터미널에 가서 하루 밤 잘래?”

“아냐. 런던에서 도착할 때 보니까 노숙자들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어. 가도 못 들어갈지도 몰라.”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해?”

“기차역도 노숙자들 못 들어오게 할까?”

“…”

“S네 민박집에 한 번 여쭤나 보자. 혹시 모르잖아.”

처음 에든버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한국인 가족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묵었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되도록 현지인처럼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여행 지론인지라 되도록이면 한인 민박은 피하는 편인데 4개월가량 한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더니 한식이 너무 그립다는 핑계로 민박을 예약했었던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물가 비싼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빈곤한 학생들로 호텔에 가 볼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못했고, 진지하게 버스터미널이냐, 기차역이냐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부활절 기간 내내 예약이 꽉 찼다는 민박집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지만 혹시 다른 집을 알고 소개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 며칠 전에 묵었던 승애에요. 런던에서 온….”

“아, 그래요. 다른 곳은 잘 둘러봤어요? 지금은 에든버러예요?”

“예. 그게 사실은 오늘 하이랜드에서 돌아왔는데 오늘 밤 숙박을 예약을 안 했었거든요.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5시간째 돌아다녀도 구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전화드렸어요. 혹시…, 친구들까지 총 4명인데 거실 소파에서라도 묵을 수 없을까요?”

“아, 그랬구나. 부활절에 방 구하기가 쉽지는 않죠. 그나저나 저녁시간인데 큰일 났네. 실은 오늘 우리 집도 손님이 많아서 우리 가족이 거실까지 사용해야 할 처지거든요. 어떡하지?”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만…. 혹시 민박하시는 다른 분들은 없나요?”

“가만있어보자…. 아, 민박을 하는 집은 아니지만 한 군데 물어볼 만한 곳이 있긴 있어요. 내가 알아보고 금방 다시 전화 줄게요.”

그렇게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우리는 에든버러의 길 한가운데서 망부석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반가운 전화벨이 울렸다. 

“그 집에 전화해서 승애 씨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와도 된대요. 민박을 하지는 않고 어학연수나 유학 온 학생들 장기 홈스테이만 하는 집인데, 마침 방도 비어 있고 젊은 부부라서 흔쾌히 받아주네. 내가 주소 줄 테니 찾아가 봐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에서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주소를 보고 집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시 힘을 내어 배낭을 들쳐 맸다. 


그러나 우리의 시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귀신이 제대로 붙은 날이랄까. 주소도 간단했고, 민박집 어머니가 설명해준 대로 가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또 길을 헤매고 점점 몸은 녹초가 되어 갔다. 소개받은 집이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서 우리에게 익숙한 중심가도 아닐뿐더러 성냥갑처럼 비슷비슷하게 생긴 주택가의 길과 집들이 우리 눈을 순간적으로 핑 돌게 만들었나 보다. 결국 얼추 근처에 도착했다고 생각될 무렵 소개받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S네 집에서 소개받고 찾아가는 중인데요. 저희가 길을 잘 몰라서….”

“지금 어디세요? 제가 모시러 나갈게요.”

당연히 한국인 교포일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게도 전화를 받은 남자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했지만, 내 지친 목소리를 느꼈던 건지 바로 길바닥에 널브러지다시피 한 우리를 데리러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저녁 9시가 다되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집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반나절 동안 스코틀랜드 전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처럼 온몸이 축 늘어졌다. 그래도 감사의 인사는 전해야지.

“갑자기 재워달라고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부활절에 숙소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어요.”

“아니에요. 어차피 방도 비어있었는데요. 그나저나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하셨겠어요. 이렇게 무거운 배낭까지 매고….”

저녁시간을 한참 넘길 때까지 아무것도 못 먹고 허기가 진 우리는 주인 부부가 특별식이라며 끓여주는 한국 라면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면서 부부의 영화 같은 러브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2년 전 대학 다닐 때, 에든버러로 어학연수를 왔었어요. 그때 교회에서 앤드류 Andrew를 만났고 요. 말 그대로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그 날 이후로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어요. 이 곳에서 결혼하고 이제 곧 우리 아기도 태어나고요.”

수줍은 듯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만삭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에 겨운 듯했지만 앤드류 Andrew는 그녀의 수줍은 미소와 3주 뒤 태어날 아기에 대한 짙은 사랑이 묻어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운명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알았어요. 우리가 결혼하게 될 것을.”

“두 분 너무 행복해 보여요. 얼굴에 행복하다고 쓰여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지금 저희는 너무 행복해요. 아기가 태어나면 더 행복해질 거고요.”

“아~. 부럽다.”

우리의 질투심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그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속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전라도 가정에서 자라서 영화같이 다정다감하게 사랑하고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죄송하지만 오래 서 있기가 힘들어서 저는 먼저 들어가 누울게요. 필요한 것은 앤드류 Andrew가 챙겨줄 거예요. 피곤할 텐데 푹 주무세요.”

그녀는 먼저 잠자리로 향했다. 그 이후로도 앤드류 Andrew는 라면으로는 부족했던 우리에게 밥도 해주고 설거지도 하고 늦은 저녁에 더해 후식까지 챙겼으며 우리가 씻은 후 잠자리까지 준비해 주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포근했던 하루밤

“앤드류 Andrew 미소에 나까지 설레네. 저렇게 착하고 따뜻한 남자라면 나라도 스코틀랜드에 주저앉았을 거야.”

우리는 그의 선한 미소에 덩달아 사랑에 빠져 낄낄대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루의 피곤을 싹 날려줄 만큼 달달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단 잠을 자서인지 새벽에 힘들이지 않고 잠에서 깼다. 부활절이라 버스표 구하기도 쉽지 않아 아침 일찍 런던행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수하기 위해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는데 앤드류 Andrew는 이미 깨어있었다. 

“굿모닝! 잘 잤어요? 씻고 아침 먹어요. 한국 음식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서양식이긴 하지만….”

“예. 아침까지 안 차려주셔도 되는데….”

어제저녁 늦게 쳐들어와서 새벽에 아침까지 챙겨 먹으려니 미안한 마음에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차린 것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과일, 빵과 계란, 그리고 음료까지 기대하지 못했던 아침밥을 먹고는 그녀에게는 인사도 못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너무 짧게 스치는 인연이지만 하룻밤이라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맞아준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내 안에서도 좋은 기운이 흘러나와 나 역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에, 짧은 인연을 가능한 한 길게 연장하고 싶을 만큼…. 마음이 통한 걸까.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앤드류 Andrew는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말 고마워요. 어제 도둑처럼 저녁에 들이닥쳐 새벽에 또 도둑고양이처럼 가네요.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잠깐이지만 오랜만에 한국의 젊은 사람들 만나서 와이프도 좋았을 거예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만날 일이 있겠죠. 그리고 이건 우리 집 방문 기념 선물이에요.”

“어머, 귀여워라.”

앤드류 Andrew는 우리에게 일일이 깜찍한 쥐 모양의 컴퓨터 마우스 장식용 스티커를 선물로 주었다. 그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또 한 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분명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걸 받고 가네요. 미리 알았더라면 아기 선물이라도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어 죄송해요. 아기 무사히 낳아서 예쁘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요.”

앤드류 Andrew는 우리가 버스에 올라탄 이후에도 한참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감정이나 기억이라는 것은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여 좋아지거나 나빠지지는 않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오래 함께 하고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좋은 관계는 가족 이외에는 힘든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인생을 살면서 찰나의 순간을 함께 나누었음에도 평생 기억되는 사람이 있고,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누어도 곁에 서면 외로워지고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여 진심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좋은 기운을 받아 힘을 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이, 좋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기 위하여. 

매거진의 이전글 인터내셔널 카페 친구들의 인터내셔널 한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