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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모씨 May 29. 2023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어쩌다 보니 디자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디자인합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 참 멋진 직업이다. 디자이너라는 단어는 일반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가벼운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디자이너라고 답하면 오~라는 가벼운 놀라움의 표시를 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가벼운 놀라움 속에는 수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전공이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디자이너라고 소개하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학교 때 전공이 디자인이었다고 말하면 보통 디자인은 미술 쪽 이어서 돈 많이 들었겠네... 내지는 어느 학교인지에 따라 그 인식이 달라진다. 그냥 디자인 전공이라고 했을 때와 이름 있는 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또한 디자이너라고 소개했을 때 디자이너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때문인지 유명한 몇몇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나와 겹쳐보고는 약간 갸우뚱하거나 직접 디자인한 결과물이 무언지를 몇 가지 보여주면 그제야 수긍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만큼 디자이너란 직업은 어느 정도 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결과물이 있어야 인정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이름뒤엔...


자신의 이름을 건 스튜디오를 차리고 개인적인 명성까지 얻는 디자이너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일반 회사에서 디자인 부서에 있는 디자인담당 직원들은 디자이너가 아닌가? 물론 맞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사원 신분으로 디자이너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허세가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든다. 디자인 업무를 하는 디자인 담당 직원들도 본인을 다른 곳에서 소개할 때, 디자이너라고 소개하기보다는 회사의 이름, 예를 들어 000 회사 디자인팀이라고 하거나, 회사의 인지도가 사람들이 잘 모를 정도이면 회사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나 업무에 자신의 역할을 결부시켜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해요라든지 커머스 기업에서 디자인 업무를 하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소개한다. 이는 세대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한국사람들에게 남아있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어필을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쑥스러운 한국인 특유의 정서 때문인 것도 있고,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주는 화려한 이미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디자이너의 화려함은 그걸 직업으로 삼았을 때 더욱 와장창 깨진다. 개인의 창의력과 콘텐츠가 어느 때보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요즘 시대에, 디자이너는 직접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예술적인 감각이 있으니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 해 배출되는 디자이너가 만 명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동경하는 구글이나 네이버, 또는 현대자동차나 삼성 같은 곳에 디자이너로 입사하는 비율은 상위 3% 도 안될 것이다. 하늘의 별따기를 넘어 화성에 정착하기보다 어렵다. 아직도 실력보다는 학력이나 경력 같은 것들이 많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것을 비단 나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의 안목과 호감도, 살아온 환경 등에 따라서 어떤 게 더 나은지를 판단하기 힘든 분야라서 누가 더 잘한다 못한다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채용하는 사람 입장에선 출신 학교나 경력 또는 경험을 토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과거 포트폴리오도 본인이 한 게 아닌 것을 본인의 것처럼 만들어 입사한 케이스도 허다해서, 요즘은 서류가 통과되어도 직접 실기테스트를 하는 게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러한 대기업 외에도, 중견이나 브랜드인지도가 있는 중소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들어가는 것 또한 녹록지 않은 과정을 겪어야 하고 운도 따라줘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쟁에서 밀려난 나머지 다수의 디자이너들은 어디로 갈까? 요즘은 플랫폼이 발전하여 개인창업을 하는 사람도 많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직종을 바꿔 디자인은 한때 추억으로 남기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제일 많이 가는 곳이라면 단연 에이전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탑티어급 에이전시는 웬만한 중견이나 대기업보다 더욱 들어가기 힘든 곳도 있다. 이런 에이전시 출신들은 추후 이직 시에도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으로 점프하기가 수월하다. 만일 당신이 학력은 조금 부족하나 실력이 있다면 상위급 에이전시에서 몇 년만 고생해도 좋다. 거기서 쌓은 커리어와 스킬은 경력직으로 충분히 대기업에 들어갈 힘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다수의 디자인 에이전시는 상당한 야근과 박봉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다.   

  


멘털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디자인 분야는 오래전부터 초봉이 낮은 것으로 유명했다. 단순히 초봉의 숫자기준으로 따지자면 물론 더 낮은 산업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수치상으로는 집계가 안 되는, 상황 상 할 수밖에 없는 일에 대한 대가가 제대로 따지기도 힘들뿐더러 대부분의 기업들은 따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디자인 에이전시에 클라이언트의 다소 무리한 의뢰가 들어왔다. 에이전시 대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라면 거절하지 않는다. 회사운영자 입장에선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 주고 내일 아침에 디자인 시안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내일 오전 회의 때 시안을 가지고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거절할 수가 없다. 거기에서 거절하는 순간 나중에 더 큰 프로젝트 진행 시 참여할 기회를 놓칠 수 있게 된다. 결국 디자이너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마인드맵이나 브레인스토밍 또는 자료조사 할 시간도 없다. 대략 요청 들어온 프로젝트와 비슷한 사례를 추려 약간 변형을 하거나 몇 가지 추가하여 디자인을 한다. 이미 시간은 자정이 넘었다. 어렵사리 마치고 귀가 후 다음날 아침. 클라이언트는 보낸 시안을 보고 여러 가지 수정요청을 한다. 여기에서 늘 디자인 분야 쪽 우스갯소리인 화려하면서도 깔끔하게 근데 너무 과하지 않고 적당하게 수정해 주세요 같은 말들이 나온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어쨌든 수정해서 보내야 한다. 어렵사리 머리를 쥐어짜 내어 수정하여 보낸 후 오후에 답변이 온다. “죄송한데 프로젝트가 잠시 보류 됐어요”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 멘털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이런 상황은 에이전시 대표가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입장의 차이일 뿐, 대표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대표는 그 일을 안 하면 회사가 날라 갈 수도 있는 입장이기에 직원이 고생할 것 같아서 프로젝트를 거절할 수 없다.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달에 내게 들어오는 돈은 얼마 안 된다. 그동안 야근했던 날들, 친구들이나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주말에도 일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직종을 바꾸자니 지난 몇 년간 대학교에 쏟아부은 돈이 아깝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이다.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된다고 해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인하우스의 디자이너가 되면 깔끔하고 멋진 책상에 앉아 아이디어스케치를 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지만 처음 입사하면 디자인에 대한 업무보다는 일반 사무직에 가까운 업무들을 주로 할 확률이 높다. 또한 인하우스는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직접 디자인하는 경우가 에이전시에 비해 많지 않을 수 있다. 잘못하면 디자인 에이전시를 컨트롤하는 관리자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연차가 늘어날수록 업무 외적으로 사내정치에도 신경 써야 한다. 결국은 회사도 사람이 다니는 곳 인지라 친분에 따른 줄타기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 분야는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수치를 증명하기 힘든 부분으로 인해 영업이나 마케팅보다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때문에 많은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부업 또는 프리랜서를 하려고 하고 나중에는 창업까지 고려하지만, 쟁쟁한 에이전시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과 자존심은 내팽개치고 부지런히 돌아다녀야만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무엇보다 인식의 개선이 제일 시급한 부분은 한국에서는 디자인이란 것을 제품 구매 시 따라오는 서비스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내가 현수막을 하나 제작한다고 치자. 현수막 제작비는 3만 원인데 디자인비가 5만 원이라고 하면 과연 누가 의뢰를 할까? 더욱이 수많은 업체가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마당에 이런 먹거리가 생기면 디자인 포함 2만 원 1만 원까지 부르는 업체들도 생겨나고, 그에 따라 디자인 퀄리티는 점점 낮아진다. 현수막이라면 결국 어딘가에 걸릴 것이라는 건데 어디에 걸릴지 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타이포그래피와 컬러 등을 통해 디자인을 입혀 심미성과 가독성을 고려하기보다는 그저 멀리서도 눈에 띄게, 잘 보이게, 글씨 크게 정도로 디자인을 하다 보니 그 현수막이 걸린 곳의 전체적인 미관도 해친다. 그렇게 현수막이 하나둘씩 늘어날수록 도시의 표정 자체가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의 인식이 당장 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과거 IT버블을 타고 우후죽순 생긴 디자인 컴퓨터 학원에서부터 최근에 생긴 디자인 의뢰 플랫폼까지, 포토샵과 일러스트만 조금 다룰 줄 알면 디자이너를 표방하며 낮은 단가로 달려드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격과 퀄리티에 익숙해져 좀 더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제공하는 대신 높은 단가와 금액을 요구하면 오히려 사기꾼처럼 되어버리는 현재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싸고 좋은 건 세상에는 없다. 디자이너들 자체가 스스로를 싸고 저렴하게 잘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디자인 업계에 발전은 없을 것이다. 회사원이 아닌 창업 초기나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은 어느 정도 자리 집기 까지는 비용적인 측면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디자이너 스스로 싸고 저렴하게 해 줘야 살아남는다는 인식보다는 스스로의 작업물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그에 맞는 작업물의 퀄리티를 제공하여 스스로의 가치에부합하는 보상까지 받을 수 있는 그런 문화로 서서히 바뀌어 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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