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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05. 2021

엄마 방

아이처럼 낮잠을 잤다. 

비 오는 날 엄마 방으로 갔다. 황토로 다진 방바닥이 따스한 숨을 쉬고 있어 낮잠 자기에 딱 좋았다. 당신은 윗목에 옷감을 펼쳐놓고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저렇게 생산적인 소일을 하는데, 사대육신 멀쩡한 아들이라는 자가 팔자 좋게 늘어져 낮잠을 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방 한쪽 구석에 세워 둔 밥상 겸용 앉은뱅이 상을 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독서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치마 아랫단 깃을 손바느질하고 있다. 돋보기 너머 당신 눈에도 졸음이 달랑달랑 붙어 있는 것 같은데, 구부정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가 딸이었다면 바느질 반짇고리를 물리고 도란도란 정담을 나눌 터인데, 온돌방 모자지간의 풍경이 참 밋밋했다.      


글 줄기가 자꾸만 뚝뚝 끊어졌다. 엉덩이를 데우는 따뜻한 온기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탓이다. 책상머리에 앉은 지 삼십 분도 안됐는데 자울자울 잠이 왔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연신 하품이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마침내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당신은 바느질을 멈추고 일어나 이불장을 열어 이불을 꺼내 덮어주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다 걸린 학생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숨 자지 그러냐.”

 “아닌데요. 몸이 뻣뻣해서 좀 펴고 있었는데요.”

나는 염치 있는 초등학생처럼 변명을 했다.

  “나도 쬐까이 남은 거 마무리 헐란다.”      


힐끗 보니 어머니의 마무리는 한참이나 남았다. 붓 글 쓰는 아들과 떡 써는 어머니가 따로 없었다. 한석봉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한석봉처럼 온돌방에서 쫓겨나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어무니, 내가 졌소이다.’      

 

어제 낮에 텃밭 일굴 때도 그랬다. 나는 마치 땅과 전투를 치르듯 후다닥 삽질을 하였다.  당신은 땅을 어루만지듯 담숭담숭 괭이질을 하였다. 초장에 기세 좋게 삽질을 하던 나는 작업이 마칠 때쯤 체력이 급강하되어 내내 헉헉거렸다. 엄마 앞에서 그것을 감추려고 참 힘들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는 일들이 많고도 많다. 나물에 밥을 비벼 내놓은 일, 맛깔난 된장을 담아 나누어 먹는 일, 모시옷에 풀 먹여 다려 눈부시게 걸어 놓는 일, 제철 생선을 골라 밥상에 올리는 일은 어머니가 안 계시면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친척들이 전화를 걸어오면 푸념석인 말을 조용히 오래도록 들어주는 일, 힘들고 지친 사람이 집에 오면 잘 대접하고 밤새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일.....   

             

그런 생각을 하며 고물고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어머니가 깨웠다. 당신은 어느 틈에 부엌에 가서 파전을 부쳐서 막걸리와 함께 내놓으셨다. 밭일에 바느질에 부엌일에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힘이,  저 여윈 몸 어디서 나오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비 오는 그날 엄마 방에서, 나는 건강한 아이처럼 낮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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