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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Feb 15. 2022

[동화] 나무 기러기

작은 기러기와 할머니가 있던 자리

바닷가 마을에 마음씨 고운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를 많이 드셔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마을 지붕에 골고루 퍼지는 시간이 되면, 할머니는 바닷가 언덕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파도가 내려다보이는 긴 성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바다 건너 사람들이 전쟁을 걸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성입니다.      


성벽 가운데에 바닷가를 볼 수 있는 커다란 문이 있습니다. 옛날에 병사들이 창이나 칼을 들고 성을 지키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평화로워져서 바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람을 마을을 지키다가 돌아가신 분들 넋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문 앞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멋진 나무 의자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곳으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를 찾아와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기쁜 날은 기쁜 노래를 또 슬픈 날은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네 사람은 할머니가 계셔서 든든하고 편안했습니다. 모두 할머니를 존경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를 위해 튼튼하고 멋진 나무 의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어느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바닷가 성문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무 의자 위에 처음 보는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목에 흰색 띠가 있는 기러기였습니다. 할머니가 다가가자, 새는 도망가려는 듯 날개를 파닥거렸습니다. 하지만 멀리 날지 못하고 빵 봉지처럼 나무 의자 밑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기러기야, 어디를 다쳤니?”

할머니가 다가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작은 기러기는 엎드린 채 눈만 깜빡거렸습니다. 

     

많이 아파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얼른 물병을 꺼내 손바닥에 물을 조금 부어, 기러기 입 가까이  가져 갔습니다. 기러기는 부리로 물을 머금는 듯 마시고 꾸벅꾸벅 졸더니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기러기를 덮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기러기는 화들짝 놀라더니, 숲이 있는 쪽으로 폴짝폴짝 서툴게 날면서 사라졌습니다. 날개를 많이 다친 것 같습니다.      


해 질 녘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기러기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낮에 처음 보았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새 같았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할머니는 저녁 내내 그 생각만 했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서도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아!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 옛적에 할머니가 아름다운 신부였을 때였습니다. 넓은 마당에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손님들이 가득했습니다. 신랑은 멋진 옷을 입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평생 한 번만 입을 수 있는 사모관대라는 옷입니다. 신부도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공주님이 입는 활옷과 족두리입니다. 결혼을 하는 신부한테만 단 한번 허락되는 옷입니다. 늠름한 신랑이 앞에 서 있지만 신부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나비 무늬가 있는 촛대와 꽃병 그리고 맑은 물과 나무 기러기가 있습니다. 기러기는 한번 맺은 사이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서로 아껴주는 새입니다. 신랑 신부도 기러기처럼 다정하게 살아라 하고 나무 기러기를 만들어 올려 놓은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마주 보고 공손히 큰절했습니다. 신랑이 나무 기러기를 두 손으로 감싸 신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백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표시입니다.   

  

할머니는 행복했던 지난 일들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가 작은 기러기를 선물로 보낸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가 성문으로 갔습니다. 할머니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기러기가 할머니 의자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 와 주었구나. 고맙다.”     

할머니가 반가워하며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기러기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지만 어제처럼 달아나지 않고 몇 발짝 떨어져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너는 어쩌다가 혼자가 되었느냐?”

할머니가 그윽한 눈빛으로 기러기를 바라보았습니다. 기러기도 눈빛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며칠 전, 노을이 지던 무렵이었습니다. 높은 하늘에 기러기들이 'ㅅ'자 모양으로 줄지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힘이 센 기러기가 맨 앞장을 섰습니다. 앞선 기러기의 날개짓으로 생긴 바람은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쉽게 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기러기들은 서로 소리를 내어 응원하고, 뒤에 따라오는 약한 기러기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앞뒤로 자리를 바꾸어 가며 호수 위를 날고 있을 때, 우두머리 기러기가  신호를 보냈습니다.

“모두 아래로 모두 아래로!”

새들은 하늘에 길고 비스듬한 줄을 긋는 것처럼 호숫가에 내려왔습니다. 모두 다 물을 마시고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였습니다. 호수가 차츰 어두워지자 갈색 부리에 물을 묻혀 몸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접고 수풀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습니다. 호숫가에는 바람과 갈댓잎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갑자기 우두머리 기러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위험해! 모두 피해!”     

그 순간 수풀 속에 잠자고 있던 기러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작은 기러기도 날개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날아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기러기의 꼬리 깃털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보다 몸집이 큰 삵이었습니다. 삵은 긴 발톱을 세워 작은 기러기를 덮치려고 했습니다. 작은 기러기는 있는 힘을 다해 날개를 파닥거리고 이리저리 몸을 피했습니다. 크고 작은 깃털이 빠져 하얗게 날렸습니다. 기러기가 겁에 질려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도와 주세요! 도와 주세요!”     

하늘로 치솟던 기러기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방향을 바꾸어 호수가를 향해 날았습니다. 기러기들은 삵한테 달려들어 부리로 온몸을 쪼았습니다. 삵은 버티지 못하고 갈대숲으로 달아났습니다. 작은 기러기는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날 수가 없었습니다. 날개가 부러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러기들이 도우려고 했지만 날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기러기들은 밝아오는 새벽 하늘을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졌습니다. 작은 기러기는 무서운 갈대숲에서 떠나기 위해 밤새 파닥거렸습니다.   

  

작은 기러기는 혼자 먹이를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까치들이 모여 있는 마른 논이 제일 안전했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낱알과 풀씨를 주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방이 잘 보여서 위험한 동물이 달려오기 전에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나 검은 독수리들이 그냥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럿이 몰려와 겁을 주고 쫓아냈습니다. 기러기는 여기저기 며칠을 쫓겨 다니다가, 성문 앞에 있는 할머니 의자에 와서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 그래, 고생 많았다.”     

할머니는 가지고 온 모이를 기러기 앞에 놓아주었습니다. 작은 기러기가 할머니가 있는 쪽으로 다가 와서 인사를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이를 먹었습니다. 작은 기러기는 그날 부터 성문 근처에 있는 수풀 속에서 살았습니다. 나무 의자는 할머니와 기러기가 만나는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참, 이상해요. 기러기가 왜 고향을 찾아 가지 않죠?”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기러기들은 원래 가을에 와서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날아가는 철새입니다. 그런데 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날아가지 않으니 무척 궁금했습니다.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날개를 많이 다쳐서 그래요. 접시꽃이 활짝 피는 날이 되면 나을 거예요." 

할머니는 접시꽃 피는 여름이 오면, 작은기러기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을 지나고 여름이 왔습니다. 작은 기러기도 날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은 헤어질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먼 바다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길 여기저기에 키 큰 접시꽃이 피었습니다. 모든 꽃은 자기를 나타내는 꽃말이 있습니다. 접시꽃은 ‘두 가지 길을 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길로 가는 것이 행복하다.’ 입니다. 할머니가 작은 기러기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기러기야, 이제 친구들을 찾아 가거라.”       

작은 기러기는 망설였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어 거친 바다 위를 날아 가기가 무서웠습니다. 할머니도 기러기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작은 기러기가 친구들을 따라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늦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러기와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기러기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더워지자 동네 사람들이 자주 성문 앞 나무 그늘에 모였습니다. 기러기는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끼익익 끽!” 하는 소리를 내며 뛰어 왔습니다. 그리고 두꺼운 부리로 신발이나 다리를 쪼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동네 꼬마들을 무척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기러기와 금방 친해졌습니다. 할머니와 동네 사람들은 바다가 보내주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식히고, 아이들과 파도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뜨거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가을이 되어 동네 사람들은 농사일로 바빠졌습니다.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젊은 부부는 꼬마들을 할머니에게 맡겼습니다. 할머니는 성문 옆에 있는 큰 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일을 끝내고 아이들을 데리러 올 때까지, 간식과 우유를 챙겨 먹이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러다가 낮잠을 자면 자장가를 불러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혼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해주었습니다. 성문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할머니와 아이들과 기러기는 날마다 즐겁게 지냈습니다.      


바빴던 농사 일이 끝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가해지고 아이들은 더 이상 성문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가을이 더 깊어지자 하늘에 낯선 기러기 무리들이 날아와 마을을 맴돌다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기러기야, 저기 보아라. 네 친구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기러기는 호수가 수풀에서 헤어졌던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바다쪽에서 찬바람이 불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성문 앞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지팡이를 짚고 나오셨지만 기침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할머니는 기러기 걱정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기러기는 원래 추위를 잘 견디는 동물이라서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혼자 있는 사람들이 혼자 있는 사람을 걱정해 주는 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첫눈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성문으로 왔습니다. 할머니는 주머니에 넣어 온 모이를 두 손에 담아 기러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안아 주었습니다. 할머니 가슴에서 나온 따뜻한 사랑이 작은 기러기한테 고스란히 옮겨 지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기러기야, 그동안 고마웠다. 이제 나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구나. ”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기러기는 긴 목을 땅 쪽으로 내리며 소리를 냈습니다. 할머니가 튼튼해진 기러기 날개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기러기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 올랐습니다. 눈 아래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습니다. 성문 앞에 커다란 나무가 점점 멀어 졌습니다. 기러기는 위 아래로 날개를 저어 날아 갔습니다. 바쁜 날개짓이 할머니에게 보내는 손짓 같았습니다. 할머니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날개짓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새봄이 왔습니다. 세상은 다시 밝고 따스해졌습니다. 그러나 바닷가 성문 앞에는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에 흰 줄 무늬가 있는 작은 기러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앉아 있던 나무 의자를 치웠습니다. 대신 나무로 깎아 만든 기러기를 긴 장대 끝에 올려 놓았습니다. 나무 기러기는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기러기에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바닷가에 성문이 있는 그 마을에 가면 아직도 솟대라고 부르는 나무 기러기 있습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 보글보글 매거진 이전 글, 로운 작가님의 '[잔혹 동화] 소녀'입니다.


5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 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소개합니다. 주제는 그림책을 매개로 하여 선정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매일 한 편씩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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