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연기법 #비이원 #깨어남
1년 중 가장 바람 맛이 좋은 때가 5월이다. 5월의 바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을 행복하고 설레게 만드는 마법 같은 구석이 있다. 이 좋은 바람을 같이 맞으려고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동네 강변 산책을 나갔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 시원한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딸아이가 최근 썸 타고 있는 남자아이 얘기로 한 시간을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가 물었다.
“아빠, 이 행복한 시간도 또 그리워지겠지? 중학교 때도 좋았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왜 그런 시간들로는 돌아갈 수 없는 걸까?””
“꿈이라서 그래.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가족을 깨닫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본능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현실적인 질문이라도 그에 대한 답을 비이원의 관점에서 들려주곤 한다. 혹시라도 나중에 더 큰 의문이 생겼을 때 마음속에서 문득 떠오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딸아이는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존재에 대한 의문과 철학적인 질문들을 자주 한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유별난 탐구에 익숙해서 인지, 의문이 생기면 편하게 질문을 한다. 보통 나의 대답은 비이원의 관점의 직설적인 내용들이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는 그 대부분을 이해하는 듯하다. 사회적 불합리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하거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흐름을 보면 분명 자기가 이원의 한계 속에 있음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이 꿈이라서 그래.”
어찌 보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일 수도 있지만, 실상을 비유하는데 이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다.
다행히 아내와 아이는 거부감이 없다. 연신 팔을 앞 뒤로 흔들며 산책을 계속할 뿐이다.
이원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이어진다고 ‘착각’한다. 방금 전의 사과가 지금의 사과와 같은 사과라고 생각한다. 방금 전의 것이 지금 순간으로 쭉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개별적인 존재들이 쭉 이어지며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원적 의식에 따른 생각의 흐름이다.
두 개의 도형이 아래 그림처럼 있다. 같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르다고 보는 게 맞는 것일까?
삼각형의 범주에서는 같은 삼각형이다. 그런데 모양이 반대로 돼있다. 그래서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고는 얘기할 수 있겠다. 꼭짓점도 세 개고 변의 길이도 비슷하니 말이다. 동시에 두 도형을 보면 모양이 비슷하긴 해도 다른 위치에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삼각형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만일 A가 계단을 굴러서 B의 모습으로 멈추었다면 어떨까? 구르기 전의 A와 구른 후에 멈춘 B는 같은 삼각형일까? 아니면 다른 삼각형일까?
이전 그림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지만 이번에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즉, A가 계단을 굴러서 B로 멈추었다는 사실도 목격했다. 지속적으로 끊어지지 않고 관찰이 가능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그놈이 그놈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모양을 기준으로 하는 <시간적 연결감>이 바로 <실체적 존재관념>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이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연결감>이 없이는 존재관념이란 것이 생기지 않는다. 이어지기 위해서 개체는 분명 다른 것들과 분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이원성의 뜻인 분리다.
실체적 존재 관념이라는 말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원성이 우리의 착각이라면 실제로는 분리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원적 관점은 둘째치고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도 모든 것이 분리된 것으로 확인이 된다. 사과는 배와 분리 돼있고, 나무는 자동차와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모든 분리가 분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결국 이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고민에 대한 열쇠다.
연기법을 통해서 밝힌 진실은 간단하다. 모든 것이 연기적 존재라는 것이다. 연기적 존재라서 개별적인 존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연기적’이라는 말은 이것 아닌 다른 것들로 인해서 (존재하는 듯) 드러났다는 말이다. 처음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다른 것들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말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애초부터 그것이라고 할 만한 존재성이 없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로 드러났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 자체다. 애써 찾아본다면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서 그것이 된 것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원인과 조건인 것이다.
이런 연기사유가 이끄는 진실은 바로 존재성의 부재다. 존재성이 사라진 모양은 말 그대로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은 것이다. 모양은 인식되지만 그 개별적인 존재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개별적인 존재성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그것 아닌 것들을 구분 지울 방법이 도무지 없다. 이것은 마치 영화 스크린에 등장한 그림이나 꿈속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처럼, 단지 한판에 그려진 입체적인 그림과 같다는 말이다. 모양은 인식되지만 존재성은 없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행복했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애초에 그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꿈과 같고 환상 같고 이슬과 같다’고 표현한다.
이런 공부라는 것은 어디 토굴이나 절집의 동안거 하안거와 같이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빌려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지금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바로 공부의 대상이다.
간단하게는 자시의 손가락을 보면서 공부하면 된다. 손가락이 없는 사람이라면 발가락으로 해도 된다. 지금 당장 손가락을 하나 들어 까딱까딱해보자. (깨달음은 지금의 일이지, 이 글을 다 읽고 익히고 배워서 나중에 깨닫는 것이 결코 아니다.) 손가락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지, 그리고 방금 전의 손가락과 지금의 손가락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으로 보이는지 살펴보자.
만일 여전히 같은 손가락처럼 보인다면 직 생각 속에 관념을 통해 보고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다.
모양이 변하면 분명 같은 것이 아니다. 앞선 삼각형 그림처럼 올라간 손가락과 내려간 손가락은 모양이 분명 변했다. 변한 것을 같은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손가락>을 이원적 관념으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모양이 변한다고 해도 그것을 <움직인다>고 해석한다. 손가락 속의 뼈도 그대로 있고 피와 살도 그대로 있으니 같은 손가락이라고 착각한다. 뼈도 살도 피도 모두 모양이다. 모두 결국 모양일 뿐인 것이 그 모양이 변해버렸다면 도대체 손가락을 시간에 따라 이어진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 <움직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모양의 다름을 변화로 인식할 뿐이지, 실제로는 움직일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기적 존재인 손가락은 손가락이라고 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에 ‘있다’ ‘없다’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모양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처인 그 모양조차 변해버렸다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없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착각도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고정적인 무엇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태어나는 듯하기도 하고 사라지는 듯도 하는 것이다.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다’는 경전의 심오한 말은 바로 우리의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해보면 확인이 가능한 일상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뿐이다. 정확히는 한순간도 머물 <것>이 없다는 말이지만 결국 같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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