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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Oct 04. 2024

삶이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뿐

어린 시절 주마등같이 지나간 그 모든 추억을 떠올려 보자. 그것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왜 그것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사라졌는가? 모든 것이 그렇게 사라졌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공을 하늘로 던지면 땅으로 떨어진다. 공이 떨어질 줄 알면서도 굳이 공을 던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땅으로 떨어질 공의 모든 여정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결국 태어나서 죽는다면 굳이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간에 느끼는 달콤함은 죽음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그때 지나온 모든 길의 가치가 판가름 난다. 길을 가는 동안은 모른다. 꽃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그 꽃길은 꽃길이 아닌 것이 된다. 삶은 죽음에 도달했을 때 진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지, 사는 동안은 그것을 알 수 없다.


실체시 했던 것을 성취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거나 그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대학교만 합격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쟁취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비로소 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것이다.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이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면 그때 눈을 뜰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의 이원적 인식 구조의 틈으로 진실이 살짝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다.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원적 인식 구조의 틈으로 진실의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누구나 똑같이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아가며, 누구나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어차피 남들도 모르는 것 같으니 나도 그렇게 살아간다. 간혹 종교 안에서 믿음을 통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 편의 드라마를 탐닉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눈뜬 자들의 언어를 이원적으로 받아들이면 소설이 되거나 종교가 된다.


허무하다는 것은 이전에 무언가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했었다는 의미다. 그런 착각이 애초에 없다면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다. 무지개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아쉬움은 있겠지만, 그것을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기 때문이다.


이성이 발달하지 않은 아이는 그림자가 사라졌다고 슬퍼할 수 있다. 이성이 발달한 성인은 그림자가 사라졌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결국 존재의 실상을 명확히 볼 수 있는 능력은 이성적 의식을 가진 인간의 몫이다. 미숙한 의식에서는 그림자를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희로애락을 만들어낸다.


당신이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개념적이고 근사한 철학의 언어 같지만, 사실은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인 일상의 언어다. 보통 우리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만일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가 없다.


존재라는 것은 개별적인 존재성이 있어야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그것’은 그야말로 ‘그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면 그것은 ‘그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과는 사과여야만 하지, 사과가 포도이기도 하고 귤이기도 하다면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누가 뭐래도 사과로서 다른 것들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립적인 것이어야 그것을 사과라는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과는 다른 모양들과 분명 구분되지만, 그 속성을 잘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이 공간에 사과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좀 더 깊게 살펴보면 사과라는 과일 하나가 인식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조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충만 살펴봐도, 우선 이 공간이라는 것이 있어야 사과가 나타날 수 있으며, 적당한 기압이 있어야 사과의 모양이 유지될 것이고, 껍질이 있어야 하고, 그 속을 꽉 채우는 수분도 있어야 하며, 하나하나의 과육도 있어야 하고, 빛도 있어야 하며, 적당한 온도가 있어야 타지 않고 이런 모양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과거의 원인 조건들은 둘째 치고, 지금 이 순간에 사과를 지탱하는 조건들이 너무나 많아 결국 그 조건들만 나열될 뿐, 정작 그 사과라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이런 사유의 순간에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원적으로 딱 잘라서 ‘사과’와 사과 아닌 것들을 분리하는 인식으로 살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그 분리가 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진짜 사과의 모습은 본래 사과가 아니라 단지 모양만 사과의 모습으로 드러났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 조건 지어져 있다는 말의 의미다. 조건 지어져 있다는 말은 조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존재하기 위해서 조건이 필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자가 존재하는 게 아닌 이유는 태양이 지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사과를 지탱하는 그 조건들이 사라지면 사과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모든 조건들이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조건 지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조건 지어진 것들만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 것들만 인식할 수 있으며, 존재하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는 말은 비유나 은유가 아니다.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이며 이원적 인식 구조를 벗어나면 비로소 알게 되는, 사과보다 더 실체적인 진실의 표현이다. 그것은 은밀하게 숨겨진 도인들의 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이원적으로 잘라 인식하면서 실제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인생에는 실제로 우리가 기댈만한 실체적 무엇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경험은 분명 그것을 가리키지만, 이원적 인식은 무언가 실체를 붙들고 있으니 이 두 경험이 충돌하며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인생에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서 의미가 없다면 그냥 막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이런 의문은 이원적인 생각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은 이원적인 상상 속에서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다. 


유니콘의 뿔을 노란색으로 칠해도 됩니까? 


이런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이원적인 질문은 모두 이와 같은 구조다. 우리의 이원적 인식 자체가 변화되면 이런 이원적 의문은 사라진다. 의문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의식의 전환이 없이 이원적인 추구만으로는 그것이 그 어떤 숭고하고 아름다운 가치라고 해도 모두 뜬 구름 잡는 것에 불과하다.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제대로 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다면, 반대로 내가 무엇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했는지 찾아보자.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조건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그 존재성을 집요하게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그림자와 같이 어떤 조건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라면 크게 의심해봐야 한다. 나는 왜 지금까지 그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아주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의 이성은 그 틈을 벌리고 실체를 마주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 

지금도 이렇게 한 치의 틈도 없이 실체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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