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 #변화 #역설 #깨어남
흔히 “변한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떤 존재하는 무언가가 실제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변한다는 것 자체가 변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변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어’를 떠올립니다. 주어는 변하는 대상을 의미하죠. 사과가 변하고, 나무가 변하며, 사람이 변합니다. 변한다는 동사를 쓸 때는 이렇게 주어가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만약 주체가 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주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다른 것으로 변했다면 그것을 진짜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변하는 주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당연히, 변하는 것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 패러독스 구조를 빨리 깨달을수록 착각에서 벗어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지금 이 책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잖아요?
책상은 현재 순간과 다음 순간에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책상을 100년 동안 그대로 놔둔다고 해보세요. 아마도 책상의 많은 부분이 변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000년이 흘렀다고 가정해 보세요. 아마도 책상의 모양이 지금처럼 남아있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상은 언제 변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까요? 100년 후부터? 아니면 500년 후부터?
책상이 변한 시점을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한순간의 일이 아니라 모든 순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순간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순간에 변하더라도 우리의 눈에 뚜렷하게 구별될 정도의 변화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즉,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이 말은 깨어남의 가장 핵심적이고 충격적이며 파격적인 힌트를 담고 있습니다.
이원적인 인식 상태에서는 마치 변하는 모든 것이 지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존재가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역설의 구조입니다. 변한다고 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잠시라도 존재했다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무언가가 변한다면, 변한다고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가 흘러내린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나무일 수 없으므로, 흘러내리는 ‘나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겼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지만, 인식되는 그 어떤 것도 고정돼 있지 않고(존재성을 지니지 않고) 역동적으로 춤추고 노래합니다. 꽃으로, 사람으로, 의식으로 그렇게 춤을 추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