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찾기 #11
그룹화 추상화를 통해 엄청난 효율성과 발전을 경험했던 인간은 이러한 개념화의 이익에 대해서 거의 종교와도 같은 믿음을 갖게 됐다. 20세기가 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인류가 이뤄낸 성과들을 보면 그런 믿음에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이는 맨 처음 이름 짓기만을 통해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름 짓기의 습성을 지속한 결과 그 위에 추상의 개념을 쌓아 올리는 것이 가능했고 그 결과 추상적인 수 즉, 메타 경계를 구축함으로 튼튼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타 경계라는 말은 경계의 경계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사과라는 이름을 짓기 시작했고 숫자라는 개념을 통해 사과의 수를 셀 수 있게 되었다. 이 숫자는 단지 사과만을 다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이름 있는 것을 셀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는데, 세상의 그 무엇이든 구분 가능한 5개라면 모두 5라는 숫자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5라는 숫자에는 사과 다섯 개를 담을 수도 있고 배 다섯 개를 담을 수도 있고 다섯 명의 인간을 담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경계의 경계, 즉 메타 경계다. 우리의 개념 짓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당연히 성공의 추억을 간직한 이상 그것을 포기하고 멈추기는 어렵다. 인간은 한 발 더 나아가 대수학이라는 경계의 경계의 경계도 만들어냈다. 이제 x, y, z를 통해서 모든 수를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개념화를 통해 경계 만들기에 몰두해 온 인류는 급기야는 본능적으로 분리라는 것을 세상의 속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받는 교육은 개념을 익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개념화를 잘하는 순서대로 사회적 기회가 주어지므로 언제나 개념화 우등생들이 사회적 힘을 갖는다. 그렇게 순환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개념을 기반으로 이원적 탐구를 계속하던 과학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경계 짓기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와버렸다는 점이다. 기존의 고전물리학을 탐구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물질의 본질을 탐구해 왔는데 이제는 경계 짓기가 한계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고전물리학의 바탕이 허물어지는 엄청난 일이 수십 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벌어지고 만 것이다. 바로 양자역학의 등장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비주의적 관점의 당위성을 위해 양자역학을 예로 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은 내가 양자역학을 과학자들보다 잘 모르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과학적 접근 방법을 통해 도달한 결과가 아무리 비이원적이라고 해도 그 접근 방법이 이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양자역학의 등장은 고전물리학의 바탕을 흔드는 것 외에도 우리의 인식에 대한 통찰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과학이라는 대표적인 이원적 사유방식의 결과로 마주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신비주의자가 단상에 올라가 비이원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숫자라는 것이 그저 개념 위에 얹어진 또 하나의 개념이라는 말을 이해하더라도 그 신뢰는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개념 자체도 고정관념으로 규정하는 우리에게 수의 세계 역시 흔들어야 할 고정관념 중 하나다. 아무리 정확하고 논리적이라도 역설적으로 그렇게 정확하고 논리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개념인 것이고 벗어나야 할 고정관념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전히 이성적인 능력과 과학기술은 삶에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고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서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다만,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고 몰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 않을 때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불필요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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