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야 Feb 19. 2021

7화. 편입에 대한 이야기 1

편입 시작부터 합격까지의 스토리와, 편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어느덧 30대가 되어버렸다, 졸업 후 대학생때의 생생한 기억을 살려 27살 즈음에 완성하기로 결심한 이 시리즈는 나의 방황과 지적 나태함 덕분에 30살이 되어서도 더디게 진행중이다. 20대를 끝내는 기념으로 내 대학생활, 그리고 20대 전반을 되돌아보았다. 20대의 수많은 빛나는 순간들 중 인생을 뒤바꾸어놓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뽑으라면 고민의 여지 없이 '편입 합격'을 꼽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성과거나, 대학 레벨이 높아져서가 아니다. 편입은 '노력'을 대하는 나의 관점, 그리고 이후의 대학생활과 진로설정, 지적 성장, 친구 네트워크, 음악적 성장 등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편입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의 글로 압축하기 어려워, 두 편으로 나누어 써보고자 한다. 편입 합격 후기나, 구체적인 입시 관련 정보 보다는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입시정보가 무의미할만큼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떤 마음으로 편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대학생은 왜 편입을 생각하게 되는가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이 글이 대학생들이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과,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투쟁하는 대학생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편입에 관심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막연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입을 결심하게 된 것은 4학기를 마친 2014년 여름쯤 부터였을 것이다. 이전 학교에서 나는, 학교의 다양한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나름대로 학교생활을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네 학기동안 다니면서 느낀건, 그곳이 학문에 대한 탐구도, 자유로운 토론과 철학도 없었던 곳이라는 것이었다. 학교의 목표는 그저 '취업'이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 수업, 제도들은 모두 취업에 특화되어 있었다. 중앙 광장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취업과 관련된 행사들이 열리곤 했다. 취업과 관련이 없는 행사가 열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기초 학문 과목 역량 향상 같은 키워드는 그 학교에서 관심갖지 않는 영역이었다. 물론 자본주의화된 최근의 대학 풍조를 거스를 수 없었겠지만, 그 학교는 유독 노골적으로 그러한 기조의 최전선에 있었다. 학교는 효율성을 절대 가치로 내걸며 학과통폐합을 통해 순수학문을 없애갔고, 학교의 성장과 발전은 취업을 기준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학문 공부를 통한 지적 성장에 즐거움을 느꼈던 나는 어떻게든 다양한 분야의 교양강의를 들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전적대의 교육 목표는 첫째도 취업, 둘째도 취업, 셋째도 취업이었다


학기가 지날수록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학교가 추구하는 방향 간의 간극은 메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전공이었던 경영학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시장과 기업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보니, 인간사회와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수업을 들을 때마다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수업이라도 다양하게 개설되면 좋겠지만, 규모가 큰 학과임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에 전공과목이 5개밖에 열리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심지어 일부 전공수업에서는 교수가 노골적으로 "학생들의 취업준비를 위해 시험문제를 쉽게 내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학년 초에는 교양과목으로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의 과목을 수강하며 전공 수업을 피했지만, 점점 학년이 높아져가면서 필연적으로 전공 수업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학교, 학과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학술적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학문덕후' 기질을 공유해줄 친구가 없어 학년이 올라갈 수록 조금은 외로운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순수 인문사회과학 학과가 잘 유지되고 있는 상위권 학교 편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편입의 종류는 문과 기준으로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다소 지엽적인 고급독해 중심의 영어 시험으로 점수를 가르는 '편입영어 스타일'과, 영어점수는 공인영어시험(토익,텝스,토플)으로 대체하고 면접이나 자소서, 학점, 논술 등을 통해 합격자를 가리는 '공인영어 스타일' 두 가지가 있었다. 나는 당시 굳게 가지고있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확실한 현재를 포기하지 말자"는 신념을 바탕으로, 비록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나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공인영어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워낙 시작이 늦기도 했고, 학원에 갇혀 1년 남짓 살아가는 수험생활은 더이상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처음 몇 개월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원에 가고 도서관에 갔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집중이 잘 안됐고, 동기부여가 확실하지 않다보니 손에 공부가 잘 잡히지 않았다. 이미 나는 세 번의 수능 경험으로 인해 입시에 상당히 지쳐있었고, 매 입시마다 한 끗 차이로 잘 풀리지 않는 것에 질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왜 전적대를 탈출하고 싶은지에 대한 동기는 확실한데, 왜 새로운 학교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동기는 다소 흐렸었다. 그렇게 여름방학 내내 편입 공부를 하다가,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결국 편입 시험이 치뤄지는 2014년 하반기에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휴학을 하고 편입에 올인하려 했지만..


그렇게 학교 생활도 편입 준비도 어중간하게 하던 나의 마음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공연기획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민간 공연기획단체에서 홍보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홍보 포스터를 서울의 주요 장소에 붙이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 중에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게시판이 많으니 붙여야겠다고 생각해 돌아다니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는 페미니즘, 테러, 자본주의와 같은 굵직한 사회적 담론이 오가고 있었다.

취업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지성인으로서 알아야할 내용임에는 부인할 수 없는 주제들이었다.

또한 학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학생으로서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반기를 들고, 자유를 외치는 모습들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세월호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을 때였다. 세월호와 관련된 주제로 다양한 학술적 토론을 하고, 유가족을 모셔와 대화를 나누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치는 다양한 게시물을 보면서, 무언가 표출하지 못했던 사회에 대한 응어리가 속에서 끓는 기분을 느꼈었다.

물론 상위권 대학들 역시 순수학문이 쇠퇴해가는 시대적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그 흐름에 그저 순응하지만 않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순수학문의 통폐합이 정말 아무런 저항도 민주적 절차도 없이 진행되었던 전적대와는 달랐다


게시물 내용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는 방법,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과 같이 시장 질서가 만들어 놓은 사고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지적 확장을 하는 모습에서 정말 강렬한 울림을 느꼈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 라는 일말의 희망과 함께

문화는 없고 취업준비만 있었던 전적대의 게시판. 학교가 아니라 학원을 다니는 기분이었다


일련의 강렬한 경험을 한 다음날 학교에 가서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다. 그 곳에는 세월호가 없었다. 총학생회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항의도 없었다. 산적한 사회 문제는 토익, 취업캠프와 같은 단어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고, 학생들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어떠한 학술적 모임이나 사회적 담론도 없었다. 학교가 만들어준 프로그램과 각종 기업에서 만든 서포터즈 따위의 게시물들만 가득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내가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활이 뭔지 이제야 좀 알겠다" 


물론 취업이 어려운 시국에 스펙쌓기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그 당시에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서강대와 이화여대에 취업과 관련된 게시물이 전혀 없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토익공부를 하고, 그들도 대외활동을 했다. 그들도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대학생으로써의 권리에 대한 문제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것과, 스펙쌓기는 결코 상충하는 분야가 아니니까.


전적대는 발전해가고 있었다. 행정은 편해지고, 건물은 날이갈수록 휘황찬란해져가며, 학생들의 입결은 매년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적 성장은 나 개인의 성장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군중속의 고독을 느꼈을 뿐이었다. 늘 전적대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내가 다른 대학으로 편입을 해야하는 구체적 이유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도피심리일까봐 스스로를 경계했었다. 하지만 포스터를 붙이면서 확실하게 느꼈었다. 내가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것은 단순히 대학 간판이 아니라, 학술적 대화를 자유로이 주고받고 사회문제를 열심히 논의할 수 있는 문화가 있는 그런 대학에 가는 것이었음을. 그래서 내가 직접 보고 느꼈던 그들만의 고유한 대학문화를 누리고싶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비교대상이 없다보니, 내가 원하는 대학생활이 무엇인지를 스스로도 잘 설명하지 못했었다. 대학 대자보는 그러한 나의 막연함을 확신으로 바꾸어준 사건이었다. 학문적 갈망에서 시작된 '의지'는, 대학 문화에 대한 갈망을 통해 '신념'으로 굳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념을 가지고 편입 도전을 시작한 나는 정말로 무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10월 말이었다


11월 한달동안 나는 학교공부,토익공부,논술공부 를 병행해서 준비했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오직 토익편입, 그중에서도 그나마 자신있던 논술로 갈 수 있는 학교들을 중심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 핸드폰 녹음을 켜둔 후 토익 문제를 풀었고,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에 논술 준비를 했다. 지하철 타고 통학하는 시간에, 밥먹는 시간에 토익 단어를 보고 영어 라디오를 청취했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간절하게 빈틈없이 공부했었다. 간절함이 커지니 이전의 입시 트라우마 같은건 생각도 안나고, 알아서 자동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한 덕분에 11월 28일 마지막 토익시험에서 920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 계속해서 800 중반대에 머물러 맘고생했는데, 마지막으로 인정되는 시험에서 900을 넘기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12월 마지막 주에 연대논술 1차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사실 연세대를 붙을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대논술 시험은 그냥 메인 대학을 합격하기 위해 미리 체험하는 워밍업 정도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치르고 나왔다. 그리고 1월 2주동안 실질적 목표였던 대학의 논술 준비를 하고 1월 중순에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기대도 안했던 연세대 논술에서 1차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혀 붙을 줄 몰랐던 나는 뒤늦게 부랴부랴 면접을 준비하게 되었다. 다행히 부모님의 지인 중에 지원한 학과 석사를 나온 사람이 있었고, 그분에게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나는 자소서에, 그동안 아픈 몸 때문에 고생하고 이를 의지력으로 극복한 경험, 다양한 인문사회 교양수업을 들으며 학술적 관심을 쌓아간 경험, 음악에 관심이 많아 직접 친구들과 버스킹을 하고 공연기획을 한 경험 등등을 녹여냈다. 남들보다 조금 특이한 1,2학년을 보낸 탓인지, 자기소개서에 소개할 자기가 많았다.


면접에서는 구체적인 전공지식을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해당 과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가 되는 용어를 물어보았다. 나의 경우, '정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문헌정보학과에서 다루는 정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이후 어떤 계기로 지원했는지, 합격하게 된다면 미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냐고 했을 때, 내가 했던 말은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저는 건강이 나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심하게 앓았고, 투병과 재활을 반복한 끝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련의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은, 대학생들은 수많은 사회적 공포를 안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 사회적 공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육체적 고통이나 실제로 힘든 것에 비하면 실재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저는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더욱 단단해졌고, 그러면서 사회적 공포를 극복해낼 수 있는 정신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취업해야 한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한다,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제가 좋아하는 학문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정작 합격 후 대학생활은 이 패기넘치는 선언대로 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면접이 끝나고 일주일 뒤, 나는 지원했던 5개 학교 중 3개 학교 1차에서 떨어지고, 가장 메인 목표로 삼던 대학 마저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았었다. 그래서 가장 높은 대학인 연세대, 그것도 한 명 뽑는데 세 명 경쟁하는 2차시험에서 붙을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래서 합격발표날 아침에 '아..고생했다.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서 즐거웠다.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날 3시 30분 합격자 발표를 조회한 나는 의외의 결과를 맞게 되었다.


당시의 합격자 조회란. 전산오류인 줄 알고 며칠에 걸쳐 계속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이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행복한 날이 아닐까 싶다. 외고입시 고3 재수 삼반수 편입 총 5번의 입시에서, 내가 목표한 대학에 합격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의 고생들이 헛된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앞선 입시실패의 아픔이 씻은듯이 내려갔다. 합격의 기쁨을 부모님 및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만끽했었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분야에 부딪히고 어려운 인문사회 교양 수업을 들으며 지적으로 성장하던 지난 날의 여정에 큰 보람을 느꼈었다. 그동안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신이 한큐에 갚아준 느낌이었다.


사실 편입 합격에는 행운도 상당히 따랐다. 편입 시험을 본 학기에 학교를 다녀서 공부시간이 분산됐는데, 오히려 전적대 3학년 1학기를 다닌 덕분에 문헌정보학과가 있는 문과대학 지원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공연 기획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서울 주요 대학에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선명한 동기부여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지인이 문헌정보학과 석사를 나온 분인 것도 큰 행운이었다. 그 해 10월에 입대할 예정이었는데, 미룬 것도 신의 한 수 였다. 당시 풋풋한 연애를 하던 여자친구의 응원도 정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합격을 위해 경쟁률이 낮은 사회복지학과를 지원하려 했는데, 전날 편입 카페에서 상당한 스펙을 가진 지원자가 사회복지학과에 지원한다는 글을 보고 문헌정보학과로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합격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문정과는 그해 인문계열 편입에서 경쟁률이 2~3번째로 낮은 과였다 (그래도 27:1이었다) 일련의 조건들 중 한 개라도 빠졌으면, 합격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수능 입시에서 정말 많은 불운이 있었는데, 행운의 기운이 편입에 다 몰려서 그런건가 싶기도 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하단 링크)

https://brunch.co.kr/@mysun0317/12


https://3000won.com/baekya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플랫폼 삼천원에서도 활동중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제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해주는 동기부여로 이어집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매거진의 이전글 6화. 밴드 동아리 사골곡 모음 part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