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자유와 보호 사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요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면 익숙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어딘가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감성의 캐릭터들,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얼굴들이 눈에 띕니다. 알고 보면 그건 실제 지브리가 만든 그림이 아니라,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지브리풍’으로 그려준 사용자들의 변형된 자화상입니다. 그림 퀄리티는 눈부시게 좋아졌고, 예전에는 한글이나 영어 같은 문자를 그림에 잘 표현하지 못하던 AI도 이제는 섬세한 디테일까지 자연스럽게 표현합니다. 기술이 한 단계 더 진화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보며 일부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소송 걸겠네”라고 농담 섞인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 말에는 단순한 우스갯소리 이상으로, 우리가 저작권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작권을 ‘어떤 스타일이나 분위기를 따라 하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저작권은 스타일이 아니라 표현에 대해서만 보호를 받습니다. 쉽게 말해, ‘지브리풍’이라는 것은 하나의 미적 경향이지, 법적으로 보호받는 고유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지브리풍 그림체로 다시 만들었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지브리가 아니라 반지의 제왕의 저작권을 가진 워너브라더스입니다. 표현의 내용은 워너의 것입니다.
저작권은 단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목적은 인류 전체의 문화적 자산을 풍요롭게 하고, 문화 산업을 진흥하는 데 있습니다. 창작자의 권리는 그 수단일 뿐이고요. 다시 말해, 저작권은 ‘모두를 위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의 저작권 시스템은 이런 목적을 비교적 잘 수행해 왔습니다. 새로운 작품이 창작되고, 그것이 산업으로 이어지며,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풍요를 만들어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AI가 만든 창작물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지브리풍 그림을 만들어낸 이 사건은, 우리가 기존의 저작권 개념으로는 보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냅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지브리 스타일에 열광하는 걸까요? 단순히 예쁘기 때문일까요? 그보다는 지브리가 전달해온 ‘따뜻한 감성’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감정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감성을 단 몇 초 만에 누구나 AI를 통해 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런 식의 재현이 계속되면, 과연 진짜 창작자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창작자의 창작욕은 단순히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게 아닙니다. 자신만의 감성과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 그 과정에서 타인과 감정을 나누는 데서 오는 보람이 큰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다듬은 표현이 단 몇 초 만에 복제되고 변형되며, 심지어 그에 대한 법적 보호조차 명확하지 않다면, 창작자는 점점 ‘표현할 이유’를 잃게 됩니다. 결국 그 피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로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창작자가 없는 세상에서는 문화의 풍요도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저작권 개념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기술의 발전을 막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술이 진정한 창작을 도울 수 있도록, 창작자들이 위축되지 않고 표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법과 사회 시스템이 재정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합니다. 저작권은 더 이상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I는 문화의 도구가 될 수도, 문화의 종말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문화 지형이 결정될 것입니다. ‘지브리풍’이라는 단순한 그림 하나에도 그만큼 복잡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