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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 지옥과 상담원의 멘탈 붕괴

전화 한 통이 전쟁이 되는 이유

by 김형범

전화 한 통을 걸었을 뿐인데, 기다림이 전쟁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기계음이 친절한 척 길게 늘어지는 인사말을 건넨 뒤, 버튼을 누르라는 안내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버튼이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번호를 누르면 또 다른 선택지가 나오고, 그 끝에는 “모든 상담사가 통화 중이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멘트가 대기표처럼 날아옵니다. 이쯤 되면 이미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화면 너머의 상담사와 연결되었을 때는 ‘안녕하세요’보다 ‘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가 먼저 나올 지경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즘의 ARS나 챗봇은 ‘최대한 상담사에게 가지 않게’ 설계된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과 비용 절감이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그 과정이 ‘길고 숨 막히는 미로’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상담사와 연결될 무렵에는 고객의 목소리가 이미 높아져 있고, 어떤 경우에는 상담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욕설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상담원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통, 많게는 백 통 가까이의 전화를 받으며, 그중 상당수가 짜증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입니다. 폭언이나 비난을 받는 건 일상이고, 어떤 날은 ‘누군가의 짜증받이’가 직업인 듯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더 힘든 건, 이런 감정노동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매일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감정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다시 다음 전화를 받는 것은, 마치 숨 돌릴 틈도 없이 링 위에 올라가는 복서와 비슷합니다.


이직률이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상담사들의 번아웃은 단순히 힘든 고객을 만나는 데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 앞에 놓인 긴 ARS 대기와 반복되는 메뉴 선택, 그리고 ‘사람에게 도달할 수 없는 구조’가 이미 고객을 화약고처럼 만들어 놓습니다. 상담사는 그 폭발 순간을 고스란히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에 낮은 임금, 성과 압박, 지속적인 모니터링 같은 내부 요인까지 더해지면, 오래 버티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어집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걸까요. 의외로 방법은 있습니다. ARS 구조를 단순화하고, 상담사 연결 버튼을 30초 안에 안내하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갈등이 크게 줄어듭니다. 고객이 한 번 말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지 않아도 되게끔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폭언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와 상담사의 심리 회복을 위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전화 한 통의 시작이 불편하면, 그 끝은 더 불편해집니다. 고객의 짜증을 줄이는 건 결국 상담사의 번아웃을 막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인내심의 부족’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과정이 조금 더 짧아진다면, 전화 한 통이 전쟁이 되는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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