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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로살롱 Oct 13. 2022

영화 속 같은 시카고 골목에 자리 잡은 집

3개국 8번의 이사가 남긴, 집에 관한 단상


푸르른 나무와 붉은 벽돌집들이 늘어서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안정감을 주었던 집 앞 골목길.



시카고에 도착해 이삿짐 트럭을 끌고 우리가 살게 될 동네로 들어섰다. 그 골목길은 영화에서 볼 법한 고풍스러운 벽돌색 건물들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 가로수가 양쪽으로 늘어선 곳이었다. 족히 50년은 넘어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이었다. 우리 집은 그 길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우리 집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오른쪽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긴 복도가 있고 그 왼쪽으로 방이 하나, 오른쪽으로 안방과 화장실 있고, 그곳을 지나면 주방이 있고, 주방을 지나면 큰 거실이 나온다. 거실은 양방향이 길과 마주하고 있는 열린 구조인데 창문이 위로 열리는 옛날 그대로의 문이다. 이 창문이 신기하고 멋져서 자꾸만 열고 싶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옛날 구조의 창문은 방음이 잘 안 돼서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이 그대로 다 전달된다. 그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주택가라 크게 시끄러울 일 없고 클래식해서 예쁘니 대만족이다. 거실 한쪽에는 약간 더 바깥으로 삐져 나간, 3면의 벽이 창으로 둘러 싸인 공간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런 곳을 보통 선룸(sunroom)이라고 부르는데, 햇빛이 잘 들어오게 만든 곳으로 대부분의 집에 작게나마 이런 공간이 있다. 이곳에 인디애나에서 직접 색칠해서 가져온 흔들의자를 놓으니 우리가 생각했던 완벽한 공간이 되었다.  


길게 복도로 이어진 길 끝에는 널따란 거실이 자리 잡고 있다. 위로 열리는 오래된 창문이 이곳만의 매력.


미국 집에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작은 공간이 따로 있다. 3면이 창으로 둘러싸인 선룸(sunroom)의 모습.



원래 선룸의 역할은 빛을 모아두는 장소인데, 집이 더워지는 게 싫어 우린 오후가 되면 여름 내내 줄곧 빛을 가려두고 지냈다.




이삿짐을 내리는 건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라, 일꾼 두 명을 불렀다. 건장한 흑인 남자 두 명이 와서 이삿짐을 지고 날랐다. 오래된 집이라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다. 오래된 나무 계단을 삐걱삐걱 밟고 올라와 각 방에 우리의 가구와 가재도구들을 채워 나갔다. 아기가 너무 어려 혹시라도 먼지가 들어갈 새라 나와 아기는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방에서 우유도 먹이고 놀아주었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조용히 잠든 아기 옆에서 우리의 새집에 대한 즐거운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우리의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그전에 살던 오클라호마 집을 출발한 지 근 5일 만이다. 그다음 날 아침을 먹고 이른 산책에 나섰다. 근처에 뭐가 있는지 동네는 어떤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앞 길 이름은 'Glenwood'였다. 십 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그 길 이름을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 길이 쓰인 표지판까지 기억이 날 지경이니 내가 그 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작은 숲 속에 온 듯한 착각이 들만큼 한적하고 고요했다. 길 양 옆으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건물은 벽돌색이거나 어두운 잿빛이다. 건물마다 2층, 3층까지 올라가 있고 한층에 양옆으로 두 집씩 있는 경우가 많다. 밖으로 향하는 현관문 옆으로 작은 정원들이 있고 철제로 만든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마다 각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지만 이 골목은 값 비싸게 잘 꾸며진 동네는 아니라 그야말로 세월이 만들어낸 내추럴한 분위기가 그곳만의 매력이다. 그 길의 끝까지 걸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 골목길을 조금 더 걸어가면 호숫가가 나타난다. 그곳은 시카고를 둘러싸고 있는 미시간 호수였다. 그쪽에서 보이는 호수의 반경은 그리 크지 않고 근처가 주택가라 작은 호수 같아 보이지만 실은 이곳이 바다만큼 넓다고 한다. 호숫가 저 멀리에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풍경이 정말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물이 거의 없는 중부에 살다가 물이 있는 동네로 오니 호숫가 뷰만 보아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이런 멋진 풍경을 놓치고 살다니, 오클라호마 시절 동안 이런 뷰를 못 보고 산 것이 왠지 안쓰럽고 분하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 나오면 이런 조용한 분위기의 호숫가를 마주할 수 있다.






호숫가는 이른 아침이라 가볍게 운동하는 사람 몇몇을 빼고는 한적했다. 이런 멋진 곳에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우리는 연거푸 말했다. 이제 호숫가 바람도 실컷 쐬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 우유 먹일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혼자 더 운동을 하고 오겠다고 해서 유모차를 끌고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대로 다시 가면 되니 남편한테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치고는 집으로 향했다. 저 앞에서 우회전, 그다음에 직진 그리고 좌회전이었나? 아니 우회전이었나? 가다 보니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가게나 간판이 있었다면 눈에 익었을 텐데 이 골목이나 저 골목이나 다 비슷하게 생겨서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아까 그곳까지만 가면 된다며 열심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시 왔다 갔다 혼자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러다가 집을 못 찾고 동네 미아가 되는 거 아닌가,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실 나는 방향치였던 것이다. 길을 모른다기보다는 방향 감각이 둔하달까. 나온 대로 못 가고 반대 방향으로 가기 일쑤다. 아기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고 아기가 깨기 전까지 집에 도착해 우유를 먹이는 것이 목표인데, 벌써 20분쯤 지난 것 같다. 이미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헤매던 그때 우리 집의 길을 알리는 표지판 'Glenwood Ave.'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는 사실 그것밖에 안보였다.

신나서 그 길을 따라 집 앞에 도착했다. 휴우, 드디어 찾았다. 안도를 하며 열쇠로 현관문을 여는데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뒤에 서있었다.

"왜 이제 와? 오다가 어디 들렀어?"

"아니, 나도 어디 들렀다가 오는 거면 좋겠다"

집 앞에서 길을 잃다니 남편은 안 믿긴다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카고 첫 집의 기억은 길 잃은 골목길에 두고 왔지만 그래서였을까. 그 글렌우드의 짙은 초록으로 우거진 가로수가 있는 골목길은 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편안하고 차분한 동네의 이미지가 그대로 담긴 사진. 시카고 첫 집 앞의 골목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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