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옌데가 꿈꾼 혁명
아마 20세기 전세계의 좌파들에게 쓰라린 패배와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들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그 목록은 차고 넘치도록 많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오히려 최종적으로 패배한 쪽이 역사의 기억에서 승자가 되고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간 흔하지 않은 두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스페인 내전” (1936-1939)과 “칠레 아옌데 정부 전복”(1970-1973)입니다.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와 칠레의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는 모두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 집권한 좌파연합 정부였지만,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고 이후 스페인과 칠레는 장기간에 걸친 파시스트 정권 치하에 놓였다는 점이 매우 비슷하지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점도 유사합니다. 구체적인 정책의 성패에 대한 평가는 이견이 있지만, 스페인의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과 칠레의 피노체트 파시스트 정권보다는 적어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와 칠레의 아옌데 정부에 대한 평가가 훨씬 호의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요. 아마 강대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마지막까지 좌파의 이상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 그리고 그러한 그 모든 노력도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점이 사람들에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비감(悲感)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해서는 굉장히 좋은 번역된 역사서가 한 권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다시 제대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칠레 아옌데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 수반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 (Salvador Allende, 1908-1973)에 관한 평전,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자인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Victor Figueroa Clark)는 런던정경대(LSE)에서 “칠레 좌파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에 끼친 영향”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입니다. 현재 런던에 체류하며 인권단체 컨설턴트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이 책이 올해 5월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아옌데에 대한 좋은 평전이나 전기가 영어권에서도 드물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무척 큽니다. 저는 이 책을 이번 여름 한국에 잠시 머물 때 읽어보았습니다. 아옌데 정부의 흥망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옌데라는 한 인간에 대해서는 저도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이 무척 기대가 되었죠.
저자는 아옌데가 이끈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몰락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좌파 쪽에서는 미국의 위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비폭력혁명을 고수하여 인민을 적극적으로 무장시키지 못했다는 것 - 이것이 쿠데타를 야기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우파 쪽에서는 인민연합 정부가 정치, 경제적 혼란을 통제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옌데가 비타협 노선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쿠데타를 불러왔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클라크는 이러한 설명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점을 지적합니다. 바로 아옌데 본인이 어떤 사람이었냐는 것이죠. 아옌데는 좌파로서 과연 어떻게 혁명을 이해하고 있었냐는 겁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아옌데는 흔한 오해와는 달리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폭력을 굉장히 혐오했으며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얻은 뒤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믿었습니다.
힘을 앞세워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사람은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를 변혁하고, 사회적 화합을 모색하며, 나라 정체의 근간을 바꿔내는 사람은 혁명적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혁명의 개념입니다. 근본적이고 창조적인 변혁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아옌데가 추구한 사회주의가 “교조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양립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이죠. 특히 아옌데가 “참여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칠레 사회에 이식시키려 했다는 점은 이 점을 잘 입증해줍니다. 클라크는 복지제도에 대한 아옌데의 생각을 예로 들며 “사회적 정의”를 상징하는 복지제도와 “정치적 자유”를 상징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칠레에서 복지제도는 사람들의 행동과,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사고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과 연계돼 있었다. 칠레 국민들은 그저 국가의 관대한 복지 혜택을 수동적으로 받는 존재가 아니라,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해 복지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복지제도 운영 전반에 대한 참여를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복지정책 입안과 집행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참여가 필요했다. 또 노동자는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도 기업 운영과 계획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 인민연합 정부는 시민들이 정책 결정 과정의 모든 측면에 통합될 수 있기를 원했다. 이 같은 민주화 과정을 통해 단순히 선거 차원을 넘어 시민이 매일매일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왜 아옌데가 칠레 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견고한 사회∙정치적 다수"를 형성하는 데에 그토록 매달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개혁과 변화에 동의하는 다수파 연합을 통해 안정적인 변화를 창출해내는 것만이 폭력과 교조적 방식에만 의존하는 극좌 혹은 극우, 그리고 더 넒게는 미국의 적대정책에 맞서서 혁명을 방어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던 겁니다.
서글픈 것은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극단주의적 노선이 만연한 사회에서 이러한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중도 통합적 노선은 승리를 거둔 적이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옌데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점진적 개혁노선을 공유한다면 당시의 중도 우파였던 기독민주당과도 협력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양극단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개량주의”에 불과한 허튼 소리였지요. 심지어 인민연합 내에서도 아옌데의 이러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는 저자의 분석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기독민주당조차도 종국에는 아옌데의 협력 제의를 물리치고 미국의 지원에 응해 결국 칠레의 헌정을 파괴시키는 데 동참했습니다. 이 점에서 클라크는 역시 인민연합 정부 몰락의 가장 큰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도움 없이 칠레의 반혁명 전선이 하나로 연합하기에는 너무나 지리멸렬했다는 것이죠. 미국의 자금 지원은 아옌데에 반대하는 야당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던 겁니다.
아옌데가 꿈꾼 “민주적 사회주의”는 과연 스러져버린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까요? 저는 이른바 세계화-국가주권-민주주의, 이 트릴레마(trilemma)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옌데의 민주적 사회주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화-국가주권-민주주의의 트릴레마라는 것은 저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는 없다는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Dani Rodrik)의 개념입니다. 세계화를 밀어붙이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선거를 통해 그들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만약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세계화를 밀어붙이면 국가주권과 세계화는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민주주의는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죠. 지금 전세계에 범람하고 있는 포퓰리즘과 극우의 결합은 바로 국가와 기성 정치권이 이 트릴레마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대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옌데가 제시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 바로 이것만이 이 트릴레마를 깰 수 있는, 그리고 이 트릴레마에 대한 가짜 처방인 포퓰리즘과 극우의 결합을 동시에 깰 수 있는 방안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아옌데의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헌법을 유린한 대통령을 끌어내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사회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른바 "가짜 보수"가 아닌, "진짜 보수"와 연합하여 한국 사회를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 다수파 의회연합을 만드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아옌데의 칠레가, 그리고 10년 전 한국의 진보정부가 보여주었듯이 소수파의 힘만으로 사회를 점진적으로 바꿔나간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다보면 교조적인 혹은 극단적인 방법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결합시켜서 다수파 연합의 의제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아마 향후 한국 사회를 다시 퇴행으로 밀어넣지 않을 중요한 출발점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