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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Jan 01. 2017

다시, 인간의 존엄을 묻는다

<사울의 아들>과 <미씽: 사라진 여자>를 보았습니다

한국은 벌써 새해 아침이 밝은 것 같습니다. 연말이 되어 학교 도서관도 문을 닫고 나니 학교 갈 일도 딱히 없어서 그간 미뤄둔 영화를 많이 보고 있는데요. 어제와 오늘에 걸쳐 영화 <사울의 아들>과 <미씽: 사라진 여자> 두 편을 보았습니다. 두 영화는 사뭇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제가 제목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국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이 두 편의 영화를 관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시대에 인간의 존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한 관객에게 그 문제에 대해 묻고 있다는 점이지요.

          먼저 <사울의 아들>은 작년 칸 영화제에서 2등상이라 할 수 있는 심사위원 대상인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입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소재의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인 라슬로 네메시László Nemes가 헝가리인이고 주연배우도 헝가리인이며, 유대계 헝가리인의 홀로코스트 경험을 다룬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고요. 감독 자신이 유대계 헝가리인 태생으로 12세 때 파리로 이주했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홀로코스트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 중부유럽 유대인의 후손이 과연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다뤘을까하는 궁금함도 있었죠. 

          영화는 아우슈비츠에서 몇 달간 노역을 하다가 결국 "이용가치"가 다하면 죽임을 당하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s)의 일원이었던 사울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존더코만도의 노역이라는 것은 바로 가스실에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사체를 치우고 소각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존더코만도에 소속된 유대인들은 동포들의 시체를 치우는 일을 담당하다가 자신이 건강이 안 좋아지면 자기가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었지요.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철저하게 사울이 보는 시선으로 제한되며 유대인의 시체는 뿌옇게 처리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음향효과를 제외한,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할 만한 어떠한 영화음악도 사용되지 않고요. 영화는 시종일관 건조하게 이 참혹한 비극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이 영화의 전부라면, 이 영화는 다른 홀로코스트 기록영화 같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사울의 아들>의 독특한 점은 바로 영화제목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체를 처리하고 가스실 바닥을 청소하다가 한 소년이 기적적으로 생존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바로 군의관에게 옮겨지고 군의관에 의해 질식사를 당하고 말지요. 그 광경을 목격한 사울은 그 소년이 바로 자기 아들이라며 유대인 랍비를 찾아서 소년의 시체를 장례를 치르고 땅에 묻어주려고 합니다. 가스실의 시체는 화장터로 가게 되어있는 수용소 원칙에 비춰봐도 이는 본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이지요. 하지만 사울은 기어이 시체를 몰래 빼돌려 존더코만도 숙소에 숨겨놓은 채 필사적으로 랍비를 찾아나섭니다. 결국 그의 행동은 동료 존더코만도들까지 위협에 빠뜨리게 됩니다.

           사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영화의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소년이 사울의 진짜 아들인지 아닌지도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 부분은 아리송하고요. 제가 보기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그 죽음에 합당한 예를 차려주려는 그의 행동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를 떠올리실 겁니다. 많은 평론도 그걸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지요. 자신의 오빠들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왕권다툼을 벌이다가 둘 다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삼촌이자 새로운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만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용하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그냥 들에 버려둘 것을 명합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폴리네이케스를 몰래 묻어주지요. 크레온 왕은 왕명을 어긴 안티고네를 생매장형에 처합니다. 왕명이라 한들 한 인간을 죽음 이후에도 저렇게 모욕당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안티고네를 움직인 것이겠죠.

          사람이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어 한줌의 재로 없어지는 지옥에서 사울의 행동은 분명 기이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으로 동료 존더코만도들의 목숨도 경각에 달렸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고요. 다만 사울의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소년의 장례를 치르고 땅에 묻어주고자 하는 그 바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사울은 인간으로서 그 소년의 존엄을 지켜줌으로써 동시에 자신의 존엄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가스실의 문을 닫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희생자들의 비명을 듣고, 이후에 가스실의 피묻은 바닥을 닦아내며 시체들을 소각장으로 옮기는, 존더코만도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 그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이란 정말 한가한 소리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들의 장례를 치뤄주고자 하는 여정 속에서 사울은 존더코만도의 한 “부속품”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인간”이 되어갑니다. 저는 이것이 <사울의 아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의 아들>이 유대인이라는 소수민족, 그리고 죽은 자에 대한 장례라는 소재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을 묻고 있다면, 한국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는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두 유형의 여성, 이혼한 워킹맘과 외국인 이주여성을 통해 그 주제에 접근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제가 이 영화에 더욱 끌렸던 이유는 감독도 여성, 그리도 두 주연배우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여성감독의 영화도 드물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여성배우를 원톱으로 내세우는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성캐릭터를 그려내는 방식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죠. 누군가의 아내 또는 여자친구로서 결국 남자 주변의 캐릭터로 소모되는 것 말고는 여성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줄 만한 영화가 거의 없다는 점은 더더욱 문제가 있죠. 이런 상황에서 온전히 여성배우, 그것도 두 명의 여성캐릭터의 이야기로 극을 끌고나간다니 흥미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는 이혼한 워킹맘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지선(엄지원)의 시선으로 움직입니다. 시간에 쫓기다 못해 조선족 보모인 한매(공효진)까지 들이며 아등바등 버텨내지만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지선이 듣는 수많은 말들은 이 시대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이 마주하게 되는 무례, 편견, 그리고 폭언의 집합체입니다. 양육권 소송 중인 전남편으로부터는, “니가 엄마인줄 다은이도 아니? 정작 하루종일 얼굴보는 건 니가 아니라 보모일텐데, 헷갈리지 않겠어?” 일터에서 만난 제작사 대표로부터는, “애가 아파서 늦은 거라며? 오늘. 이래서 내가 애엄마들하고 일하기 싫어요. 돈주고 지새끼들 사정까지 봐줘야돼.”

          그런데 어느 날, 보모 한매가 아이를 데리고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영화의 부제인 사라진 여자는 바로 한매를 지칭하는 것이죠. 지선이 한매를 찾는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는 바로 한매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였는지에 대한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기 시작합니다. 아마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아시는 분이라면 이러한 구조-즉 누군가가 실종되거나 살해된 이후 그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그에 얽힌 과거가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나타나는-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변영주 감독의 <화차>도 바로 이러한 구성을 따르고 있지요.

          한국인 남성과의 결혼을 위해 이주해 온 외국인 여성인 한매가 한국에서 겪는 차별∙혐오∙폭력은 지선이 한국인 워킹맘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층위의 것입니다. 관객들은 한매의 삶 속을 내밀히 그려가는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가 “외국인 이주여성”으로서 한국에서 감당해야 했을 그 엄청난 폭력과 억압을 보며 말문이 점차 막히게 됩니다. 그리고 왜 그녀가 지선의 아이를 데리고 떠났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지요. 조선족 출신의 외국인 이주여성. 한매가 가진 이 이중의 정체성과 그녀의 삶은 한매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계층임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이렇게 방치된 사람들이 존재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울의 아들>과 <미씽: 사라진 여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존엄을 지켜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떠올리자니 우울한 마음이 앞섭니다. 지난 한 해는 전세계에 걸쳐 정치지도자들부터 인간에 대한 존중은 커녕 혐오와 차별을 앞장서서 선동했고, 또 그 선동이 먹혀들어갔던 해였기 때문이죠. 이 점에서는 한국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가장 참담한 것은 바로 다름아닌 정부가 세월호 유가족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그 조롱과 모욕을 주도하고 또한 그것에 부화뇌동한 자들은 바로 우리 이웃의 존엄을 지켜주기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던져버린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무척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언급을 떠올려봅니다. 교황님은 북아프리카에서 탈출하던 난민들이 선박 침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서도 어느 누구도 진실로 애통해하는 사람이 없다며 무관심의 세계화란 말을 꺼내셨지요. 그때 교황님이 구약성서의 유명한 일화 - 동생인 아벨을 죽인 후, 이를 추궁하던 하느님 앞에서 모른다고 잡아떼던 카인 - 를 비유로 미사 강론에서 하신 말씀을 옮겨보며 글을 마치려 합니다.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한 2017년을 바라보며, 우리가 지켜야 할 희망과 미래는 결국 우리가 서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줌으로써 우리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데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저 역시도, 그리고 여러분 모두도 그러한 한 해가 되시길 빕니다.

 

“너의 형제는 어디 있느냐?”
그러면 이 피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누군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겠지만 확실히 나는 아니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어째서 네 형제의 피가 나에게까지 울부짖느냐?”
오늘날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로서의 책임감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적인 태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길가에서 초죽음이 되어 있는 형제를 보고도 그저 ‘안됐네’하고 생각할 뿐, 계속해서 갈 길을 갑니다. 그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하게 말입니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문화’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른 이들의 울부짖음에 무감각하게 말이지요. 그저 한낱 아름다운 거품 속에 살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착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고작 이런 것들 때문에 남들에 대한 무관심, 더 나아가 세계적인 무관심이 도래했습니다. 곧 오늘날 세계화된 세상은 무관심의 세계화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익숙해졌습니다. 우리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흥미도 없지요. 우리 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에게 ‘익명성’을 가져왔습니다. 특히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모두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진슬기 역,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가톨릭출판사, 2014), 145-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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