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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Apr 02. 2017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습니다

벌써 4월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중 하나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습니다. 작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노동, 빈곤과 같은 문제를 잘 그려내는 감독인 켄 로치 감독이 간만에 내놓은 영화여서 무척 기대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호평하시는 분들도 많아서 더욱 보고 싶었고요. 영화는 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첫 화면이 나오기 전에 배우들의 음성만으로 진행되는 영화 도입부부터 영화의 주제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블레이크는 질병수당을 신청하려고 하지만, 질병수당 신청을 담당하는 심사관은 정작 심장과는 별 상관도 없는 지엽적인 질문들을 계속 던지며 이 사람이 과연 “질병을 허위로 신고한 것이 아닌가”를 가려내려고 합니다.

          다니엘의 주치의가 정작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진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질병수당 심사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재심사를 요구하거나 항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데, 그 기간 동안 다니엘은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지요. 자세한 탈락 이유를 알기 위해 부서의 담당자와 통화하려고 해도 ARS에서 직접 연결되기까지 몇 시간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정부기관과 통화하기 어려운 상황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네요, 심지어 영국의 이 상담전화는 수신자 부담도 아닙니다!). 인터넷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다니엘이 인터넷을 우회하여 전화나 대면으로만 이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는 것이죠. 그 사이에 굶어죽을 수는 없기에 다니엘은 질병수당 대신 구직수당이라도 신청하려고 하지만 이 역시 산 너머 산입니다. 당장 일을 할 수 없는 다니엘이 구직수당을 얻으려면 끊임없는 “구직활동 증거”를 모아야 하는데, 가능할 리가 없죠.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복지제도가 정작 그 복지수당이 필요한 사람을 옥죄고 있는 형국인 겁니다.

          영화는 복지제도의 허점 외에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푸어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다니엘의 주변 인물 중 하나인 케이트의 삶이 그렇지요. 런던에서 쫓겨나듯이 뉴캐슬로 이사와서 홀로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케이트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일하며 학업도 다시 시작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가난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케이트의 삶을 보며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최저임금 관련 연설이 생각났습니다. 미국의 최저임금을 1년 단위로 계산하면 약 1만5천 달러가 됩니다. 과연 지금의 미국 사회에서 그렇게 일하며 그 임금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당신들이 그렇게 해보라는 일갈이었죠.  또한 몇 년 전,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던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도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을 위해 만든 복지제도가 결국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정작 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수치심, 절망,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상황이 불의가 아니라면 무엇이 불의일까요?

          영화는 해묵은 논쟁 중의 하나인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구분을 둘러싼 논쟁도 환기시킵니다. 끊임없이 당신이 일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길 요구하고, 또한 당신이 정말 극도로 가난해서 이 돈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증명하길 요구하는 선별복지 시스템이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스템이 과연 효율적인 것일까요? 복지국가 시스템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는 국가에서 기본소득이 주요한 정책의제로 등장했다는 것은 선별복지가 어느 때나 잘 작동하고 효율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선별복지의 수혜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소요된다는 것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역시 생생하게 보여주지요. 물론 모든 것을 보편복지로 돌릴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분야, 어떤 항목에서 보편복지와 선별복지가 효율적일지, 또한 그것을 어떻게 하면 혼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있는지-이러한 것들을 고민하고 그 과정을 시민들에게 공개하며, 또한 그 과정에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것. 이런 것이 정부가 응당 해야할 일이 아닐까요. 조금 있으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탄핵당한 이 정부, 그리고 그 전의 이명박 정부가 과연 이러한 의제에 진지한 고민을 갖고 임해왔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정말 회의적이네요.

          영화를 보며 마음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대처 정부가 남긴 우울한 유산이 평범한 서민들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영국 사회의 모습이 한국의 지금 현주소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죠. 영화 후반부에 결국 구직수당을 포기하고 자신을 명단에서 빼달라는 다니엘을 만류하며 수당 담당자인 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질병수당 탈락 항고에서 패소할 수도 있고 그러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겁니다. 수당 신청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당을 포기하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요.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았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들이 받을 수 있는, 그리고 받아야만 하는 정부의 보조를 포기하고 말았던 걸까요?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다니엘의 글은,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그 글은 우리가 “공짜밥”과 같은 저열한 수사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할지도 현명하게 일러줍니다.

“My name is Daniel Blake, I am a man, not a dog. As such, I demand my rights. I demand you treat me with respect. I, Daniel Blake, am a citizen,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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