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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Oct 06. 2017

"두 개의 프랑스"

구체제와 신체제가 공존하는 나라

제가 지난 번 글에서 말씀드렸던 프랑스의 복장 터지는 행정처리는 이 나라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기관 내 부서들 사이에서 업무 공유가 전혀 안되어서 각 부서 사람들이 같은 사안에 대해 저에게 다른 말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요. 서류가 발급되었다며 저에게 우편으로 안내가 와서 서류를 수령하러 갔더니 아직 서류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특정일에 처리된다고 했던 일이 일주일째 되도록 처리되지 않아 왜 그러냐고 문의했더니 다른 기관에서 자기들한테 필요한 지침과 정보를 보내주지 않아 자기들도 기다리고 있다며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요. 사실은 원래 지난 여름 비자신청 과정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속 터지는 행정처리에 관해 글을 썼다가 지금 글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미 인터넷에 보면 프랑스에 유학 중이거나 체류 중인 분들이 프랑스의 악명높은 일처리 과정에 대해 아주 상세한 체험담을 남기셨더라고요. 저는 또 다른 “답답함”으로 점철된 경험담을 덧붙이기 보다는,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행정처리 관행을 제가 전공하는 17-18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월 중순,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에 지도교수 선생님을 만나 프랑스의 답답한 일처리 과정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선 웃으시면서 “프랑스의 관료제”를 미리 체험하는 것이라 생각하라고 하시더군요. 프랑스는 여전히 “구체제”(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의 그늘 아래 있다고요. 구체제는 프랑스 혁명(1789) 이후 탄생한 용어로, 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던 혁명가들과 혁명에 호의적이던 프랑스 역사가들이 자신들이 구체제를 뒤짚어 엎고 “신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생겨난 용어입니다. 즉 혁명 이전의 프랑스는 구체제 사회였다는 거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미 20세기 후반에 많은 역사가들이 혁명을 경계로 프랑스 사회가 구체제와 신체제로 명확히 갈리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오히려 구체제 프랑스 사회가 혁명 이후의 사회와 밀접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밝혀냈습니다. 지도교수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하신 것은, 프랑스 사회가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구체제적 속성과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죠.

          우리가 흔히 혁명 이전의 프랑스를 설명할 때 자주 접하는 용어로 “절대왕정” 혹은 “절대주의”가 있을 겁니다. 도식적인 표현에 따르면 16-18세기 프랑스는 국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귀족들을 복속시키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는 거죠. 이 과정에 국왕은 중간계층(부르주아)을 자신의 권력 확대과정의 협력자로 발탁하게 되고, 후일 자신들의 부에 걸맞은 정치적 권력을 갖기를 원하는 중간계층이 귀족들을 공격하며 혁명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이제 역사학에서는 거의 기각된 설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국왕이 정점에서 귀족들을 빈틈없이 통제하는 “절대주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결코 압도적인 권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가문들이 국왕과 연합해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귀족들의 광범위한 협조 없이 프랑스 국왕이 왕실직속 내각의 힘만으로 국가를 관리하는 것은 17-18세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는 어떻게 하면 지방으로부터 세금을 더 얻어낼 수 있을까하는 실용적인 목적이 최우선 고려사항이었습니다. 따라서 “절대주의”적인 방법으로 지방 귀족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에 퍼져있는 왕실의 사적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지방 귀족들과 협상하고, 주요한 세금 징수 조건들을 조율하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즉 일률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방식이 아니라 각 지방에 특수한 제도적∙사회적 맥락에 맞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거죠.

          우리가 흔히 세계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사” 혹은 “지방 지사”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 의미가  다소 달라집니다. “절대주의” 시대에 국왕이 지방 귀족과 기존 관리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지방에 파견했던 국왕 직속 관리인 “지사”는 국왕의 권력강화를 보여주는 지표로 자주 언급되지요.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관찰사처럼요. 그러나 당시 이 지사는 지방 관리들을 대체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정부가 일정 금액을 받고 희망하는 사람에게 관직을 판매하는, “매관매직”이 중앙정부 세입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요, 당시 이렇게 매매할 수 있는 관직 수가 대략 45,000개였던 반면 지사직은 300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지사는 국왕에게 약간 우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봐야 더 사실에 가까울 겁니다. 당시 돈을 주고 관직을 샀을 경우, 별도의 세금을 내면 자식들에게도 세습이 가능했으며, 국왕은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사람의 지위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마음대로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국왕은 지사직을 통해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관리들을 어느 정도 만들어낼 수는 있었지만, 수많은 다른 매관직 관리들을 축출할 수는 없었던 거죠.

          이렇게 기존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를 기존 제도에 “덧붙이는” 방식은 구체제 프랑스 관료제와 행정체계의 상징이 됩니다. 세금도 마찬가지였죠. 기존의 세금은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금이 기존의 세금에 덧붙여졌습니다. 중앙에서 지방의 강력한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던 후견인-피후견인 네트워크 역시 근대적인 정부 관료제가 등장한 이후에도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앙의 유력한 정치가가 지방의 소귀족들과 정치적 후견관계를 맺고 이 관계를 통해 지방의 대귀족들을 견제하는 방식은 여전히 프랑스에서 성행했죠.

          문제는 이렇게 덧붙이고 덧붙여진 관행과 제도들이 구체제 프랑스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재정정책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요. 18세기에 이르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이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채권의 이자지급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공신력을 확보하면서 안정적으로 재정정책을 운용할 수 있게 됩니다. 대상인∙ 금융가들에게 큰 규모의 자금을 빌린 뒤 그들에게 자국의 세금을 일부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징세청부 방식의 재정정책으로부터 영국과 네덜란드는 점차 벗어나게 되었던 거죠. 그러나 프랑스의 중앙은행 설립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여전히 대상인과 은행가들에게 차입을 통해 급한 돈을 확보하는 방식을 버리지 못합니다. 대상인∙금융가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이 돈을 갚지 못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파산을 선언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프랑스는 점차 정부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워집니다. 정부부채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어렵다면 남은 것은 세금을 인상하는 것일 뿐일텐데, 역사적으로 조세저항은 한 국가를 파멸로 이끌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문제였죠. 프랑스는 결국 18세기 말, 세금징수 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의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혁명 발발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이른바 지금 프랑스의 행정처리와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논리적 비약일테지요. 저는 다만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수없이 쏟아지는 프랑스 유학생과 거주민들의 프랑스 행정처리에 대한 분노와 한탄을 프랑스 역사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느낌이 들었던 거죠.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나 관행을 새로운 제도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제도나 관행이 기존 제도에 계속해서 얹어지면서, 기존 제도와 새로운 제도가 동시에 굴러가는 - 이 모습이 아마 지도교수 선생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던 “구체제의 그늘”이 여전히 존재하는, “두 개의 프랑스”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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