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의 <정치에서의 거짓말>과 영화 <펜타곤 페이퍼>
지난 주말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 정부 기밀문서 유출을 다룬 영화인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를 보고 왔습니다. 미국에선 이 영화가 <더 포스트The Post>란 원제로 먼저 개봉했는데요, 한국에서도 이 제목으로 상영되는 것 같네요. 사실 두 제목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긴 합니다. 영화는 미국 정부가 1945년부터 1967년까지 어떻게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고 그 전쟁을 수행했는지에 관해 조사한 미 국방부의 기밀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워싱턴 포스트 (Washington Post) 지가 입수하여 폭로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펜타곤 페이퍼의 원래 제목은 “United States - Vietnam Relations, 1945-1967: A Study Prepared by the Department of Defense”입니다. 그러니까 미 국방부가 베트남 전쟁의 개입과 수행과정에 대해 자체적으로 분석한 보고서인 셈이지요.
영화는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 같은 대배우 (두 배우가 여태까지 한번도 같은 작품에서 연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 좀 신기했습니다)가 출연하고 스필버그가 연출을 맡은 - 전개 방식이나 연기, 연출 방법이 대략적으로 예상이 되는 - 어떤 면에서 굉장히 전형적인 영화이긴 합니다. 특히 절정 부분에서 이젠 거의 클리셰라고 봐도 될 정도로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음악을 삽입하는 방식은 뻔하다고 여겨질 정도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을 데리고 안정적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겁니다. 저는 영화가 거의 100분 정도로 느껴졌을 정도로 전체 이야기를 깔끔하게 잘 마무리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실제 러닝타임을 보니 116분이네요) 현대영화의 러닝타임이 갈수록 길어지고 100분에서 110분 정도로 영화를 끝내지 못하는 감독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저는 이 영화와 연계해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소논문 “정치에서의 거짓말” (Lying in Politics)을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이 소논문의 부제는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소고” (Reflections on the Pentagon Papers)로, <펜타곤 페이퍼>가 저술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에서의 거짓말”은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라는 제목의 책에 아렌트의 다른 소논문들과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길사에서 한국어 번역본을 이미 출간했더군요) 아렌트는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로 홀로코스트를 피해 처음에는 프랑스로, 그 다음은 미국으로 이주했지요. 특히 그녀는 나치 전범이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 이란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사악한 악의로 가득찬 전범이 아니라 이웃에게 친절하고 자기 일에 성실했던, 대단히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란 말로 이러한 아이러니를 표현했습니다.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국가기구의 폭력에 순응하거나 협조하면서 나치의 만행이 탄생하고 확대될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아렌트는 이후의 저서에서도 정치와 인간, 그리고 공동체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합니다. 소논문 “정치에서의 거짓말”은 바로 미국 정치사의 극적인 순간과 아렌트의 연구 지향이 만난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펜타곤 페이퍼>의 핵심은 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으로 이어지는 역대 미국 행정부가 의회와 대중을 상대로 20여 년간 기만극을 펼쳐왔다는 점인데요, 다시 말해 미국 정부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어떻게 개입했고, 그 전쟁에서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의회와 국민에게 설명하지 않고 거짓말을 반복했습니다. 아렌트가 “정치에서의 거짓말”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도 이 점일 겁니다. 아렌트는 이 거짓말이 대학과 씽크탱크에서 발탁되어 정부 고위직에 몸담은, 이른바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게임이론과 시스템 분석 등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스스로를 대외정책의 “문제해결자”로 자처했지요. 아렌트는 이들이 이론과 법칙에 집착하며, 현실정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마치 자연과학자들처럼 이론과 법칙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들이 결코 자연과학자들과 같을 수 없는 이유를 명료하게 제시하죠. 이들은 그렇게나 이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만, 정작 자연과학자들처럼 자신의 가설이나 이론이 사실에 의해 입증되거나 부정될 때까지 “기다릴 줄” 모른다는 겁니다. 대신에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현실세계에 “끼워 맞추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컨틴전시 (Contingency)라는 용어를 꺼내는데요. 이 컨틴전시라는 말은 직역하면 “만일의 사태”로 옮길 수 있는데, 역사학에서는 “가변성”이란 말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즉 역사에서 “미리 정해진” 일이나 “단일 요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그때그때 인간의 결정과 행동, 그리고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이죠. 역사학에서 도식화된 이론이나 설명을 경계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 현실세계의 가변성입니다. 현실세계는 실험실이나 이론 도출 과정처럼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적인 세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해결자들은 이러한 컨틴전시를 무시하고 (왜냐하면 자신들의 구축해놓은 가설과 이론에 맞지 않는 사례들이 자꾸 발생하니까요) 자기기만에 빠져들게 됩니다.
아렌트가 열거하는 수많은 사실들은 읽다보면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을 무시하고 그렇게 무모한 전쟁을 20여년 간 끌어올 수 있나?” 하는 상식적인 의문과 바로 그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허탈함 때문이지요. 첫 번째로 베트남 전쟁의 주요한 개입 근거였던 도미노 이론은 이미 1964년 케네디 대통령과 CIA의 대화에 의해 부정됩니다. 만약 남베트남과 라오스가 북베트남의 통제아래 들어가게 된다면 동남아시아 전역이 필연적으로 공산화되겠는가라는 대통령의 질문에 CIA는 캄보디아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의 어떤 국가도 공산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합니다. 더구나 공산세계 자체도 소련의 지령을 받고 그 아래 국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런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베트남은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 독립적인 공산국가를 수립하고자하는 구상을 내비쳤었지요. 공산권이 동남아시아 전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는 전제도 틀렸던 데다가 동남아시아의 공산국가도 소련의 지시 - 즉 외부의 지원이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남베트남에서 암약하는 공산주의 게릴라 부대 - 베트콩이 외부의 지령과 지원을 받고 움직이는 이들인지에 관한 문제에서도 1964년 미국 내부 정보기관들은 베트콩의 대다수가 현지에서 충원된, 자생적인 조직의 일원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문제는 정책결정자들이 이런 기초적인 사실들을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폭격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외부지원을 고사시킬 수 있다고 선언하며 북베트남에 폭격을 감행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렌트가 언급하는, 이 문제해결자들의 최악의 실책은 바로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철저한 무지였습니다. 이 정책결정자들 중 아무도 “베트남인들이 거의 2천 년 동안 외부 침략자들에 대항해 맞서 싸워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베트남이 오랜 기간 이 지역에서 훌륭한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점은 완전히 도외시한 채, 자유진영의 지도국가라는 자아도취에 빠져서 베트남을 문명세계와 아무 관련없는 “후진적 소국”으로 치부하는 모습까지 보이죠.
따라서 아렌트는 미국 정부 내의 이 문제해결자들이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역사적∙정치적인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 - 다름아닌 바로 그것이 미국의 대외정책과 군사개입에 있어서 재앙적인 패배를 만들어냈다고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거짓말을 한 이유가 바로 “적”때문이 아니라 “국내 정치와 프로파간다”를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의회를 속이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에 가한 폭격은 겉으로는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를 막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라고 발표했지만,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최초 폭격이 예정되어 있던 시점에 이미 남베트남 정부는 철저하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져있었습니다. 게다가 1965년부터 명백한 승리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전쟁의 목표는 “적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북베트남이 여전히 전쟁 수행의 의지를 굽히지 않자, 이번에는 “굴욕적 패배를 피하는 것”으로 전쟁의 목표가 또 한 발자국 후퇴하지요. 아렌트는 <펜타곤 페이퍼>가 국가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전쟁의 패배가 미국과 미국 대통령의 위상에 가할 수 있는 충격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있다고 지적합니다. 패배 그 자체보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 - 즉 “전쟁에서 진 첫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고, 그것이 바로 20여년 동안 이어진 거대한 기만극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영화가 이 <펜타곤 페이퍼>가 내부고발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에 의해 유출된 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의해 특종기사로 보도되며 엄청난 이슈로 부상하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렌트의 <정치에서의 거짓말>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진실에 대해 거짓말을 해 온 정부, 그리고 그 정책결정자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면, 영화 <펜타곤 페이퍼>는 그 보고서가 유출된 뒤에도 정부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두 신문사의 보도를 막기 위해 연방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전을 벌이는 닉슨 행정부의 또 다른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죠. 영화의 마지막이 미국 현대 정치사의 거대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는 장면인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정부가 국민과 국민의 대표인 의회를 속이고, 심지어 그 기만행위를 지속적으로 획책하는 것은 설령 국가안보라는 대의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점 - 바로 이 교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닉슨 행정부가 벌인 최악의 자폭행위였던 것이죠. 그 교훈은 지난 10년 간 국정원과 군 기무사를 마치 자신의 사적 흥신소처럼 사용하며 국내정치에 개입시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교란해 온 자칭 “애국보수” 정부에도 유효합니다. 겉으로는 국가안보를 되뇌이면서 국내 정치와 프로파간다를 위해 끊임없이 국민과 의회를 속여왔던 것이죠. 제6공화국의 위기를 불러온 자들이 다름아닌 애국과 보수를 그렇게나 떠들어댔던 자들이라는 점은 이들이 사실 “보수할” 가치조차도 갖고 있지 않으며 애초에 “애국자”는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줄 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