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선 Dec 07. 2023

‘사이’- 단어의 위안.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이문재 사막-     


필사를 할 정도로 글쓰기에 열심은 아니지만 시는 운율이 있어 손으로 적는 재미가 있다.

꾹꾹 눌러쓰다 보면 더 쉽게 마음속에 들어오는 시, 그렇게 한동안 위로를 주던 대부분의 시가 노트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시가 종종 머릿속을 맴돈 것은 ‘사이’가 주는 메타포 때문이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기류처럼 ‘사이’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귀가 맞지 않는 듯 뭔가 삐걱거릴 때, 또는 잠시 한눈을 팔고 싶을 때, 즉 힘들거나 애매한 상황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랑과 우정사이, 비와 음악사이, 당신과 나 사이, 생각해 보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이 라기보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는 그 무언가였고 때로는 추상명사 사이에서 방황하는 애매한 감정 또한 사이라는 말로 쉽게 대체되곤 했다. 도대체 ‘사이에 뭐가 있길래?’ 머리를 싸매고 분석하는 것은 사이에 대한 모독(?)이다. 그런 혼란함을 대신해 주는 것이 사이의 존재이유, 그냥 인정하면 된다. 인정은 미덕일 뿐 아니라 치유의 힘을 가진다. 때로는 대책 없는 상황종료도 필요하니까.

      

사이와 비슷한 말은 틈이다.

대체로 보이지 않는 사이와 달리 틈은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한다. 사이와 공유점은 ‘보이지 않는 틈’, 메꿀 수 있는 ‘보이는 틈’(공간적)과 달리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의 틈, 관계의 틈 같은 ‘보이지 않는 틈’이다. 틈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기고 자라는 몸속의 염증처럼 서서히 금이가고 균열이 생겨 인지하기 힘들다. 응급처치시기를 놓친 틈은 점점 커지다 결국 붕괴되고 더 이상 틈이 되지 않는다. 사라진 듯 보이는 틈은 무너지면서 새로운 틈을 만든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가 같은 파도가 아니듯 세상의 모든 틈은 새로운 틈, 생성과 소멸은 예외 없는 법칙이다.

      

틈이 항상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틈을 사랑한다.

장마틈새, 명절틈새, 휴가틈새 같은 틈새시장은 내가 좋아하고 찾아다니는 틈이다.

북적이던 도심의 빌딩사이를 유유히 걸으며 눈을 바짝 붙여 쇼윈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휴가틈새, 주차장 같았던 도로는 누군가 빗자루로 쓸어낸 듯 깨끗해지고, 휴가철 텅 빈 도시는 낯선 여행지로 변신한다.

그칠 것 같지 않은 비가 선심 서듯 잠시 쉬는 틈, 목욕을 마친 반짝반짝 빛나는 세상을 만나러 나선  장마틈새 산책길, 명절을 졸업(?)하고 맞는 긴긴 명절연휴, 밀린 빨래를 하듯, 제쳐두었던 일들을 뒤척거리는 한가로움, 내가 사랑하는 틈새시장이다.


지금은 빈가지 틈새, 무성한 잎에 가려졌던 풍경이 다가오고 새들은 가지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지사이로 바람이 쉬어가고 손님처럼 낮달이 걸리고 누군가의 상념 한 조각이 삐콤 고개를 내밀 때 빈가지는 하늘 공연장의 주인공이 된다.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가 겹쳐지는 이맘때 가장 많이 듣는 사이는 ‘흰 눈사이로~’,

노래를 듣다 보면 설원에도 눈보다 눈 사이가 더 많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막에 모래보다 사이가 많듯이 나는 나보다 많은 사이에 있다. 나는 인지할 뿐 그 많은 사이를 다 읽을 수는 없다. 어쩌면 나는 사이로 만들어진  존재.. 사이의 위안은 그런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패싱(passing)_ 단어의 위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