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준비를 하다가 느닷없이 ‘패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니 ‘느닷없이’라기보다 ‘어쩔 수없이‘가 맞다. 세상에 이유 없는 무덤이 없듯 ‘느닷없이’는 없다. 조금씩, 차곡차곡 쌓여 미처 감지하지 못했을 뿐, 모든 사건, 사고는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패싱’이 떠오른 것도 그런 이유, 그 내막은 ‘말해 뭐 해’다.
임계점에 도달한 압력솥처럼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섬광처럼(?) 떠오른 ‘패싱’은 폭발하지 않게 서서히 김을 빼주는 압력솥의 추가 되어준다. 뺑글 뺑글 추가 돌아가듯 단어는 진정제 역할을 해준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약 먹을 시간, 약을 먹듯 단어를 삼킨다. 몸속으로 들어간 단어는 온몸으로 퍼지며 서서히 약효를 드러내고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 단어는 줄줄이 사탕처럼 엮이며 한동안 몸속을 헤집고 다닌다.
작용에 따르는 부작용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어 이야기.
패싱은 말 그대로 지나치는 것, 통과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음은 모든 단어가 가지는 속성, 내 처지에 맞춰 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 머릿속 패싱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지나치는 것은 모면하기 위한 것, 쉬운 예로 길게 얘기하기 싫을 때 치고 빠지는 것(모임에서 인사만 하고 바쁜 척 돌아서기), 비약하면 무심, 방치로 이어져 가끔 자책도 하곤 했는데 어느새 긍정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시대감, 넓고 느슨한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요즘, 지나친 관심은 부담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안전 운전항목에 차간거리유지가 있듯 인간관계에도 적정거리가 있다. 흔히들 친할수록 적정거리를 잘 지켜야 한다지만 거꾸로 적정거리를 잘 지켜야 친밀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친밀한 관계인 가족의 적정거리 유지는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맨 아래에 있는 듯 착각한다.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수많은 분쟁은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친밀할수록 패싱은 불문율, 모든 갈등과 괴로움은 패싱이 안될 때 일어난다.
패싱이 안되어 괴로운 것과 달리 너무 잘 되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 예로 사람들이 모이는 식당이나 카페, 공공장소에서 주변 사람들은 투명인간화 시켜 자기들만 있는 듯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것도 일종의 패싱이다.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도 심리적 거리는 한없이 멀어지게 할 수 있는 패싱,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요즘은 몸은 가까워도 마음은 얼마든지 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패싱은 타인에 대한 방관, 방치뿐 아니라 내 존재감의 부정으로 이어 질 수 있다. 여기서 패싱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것을 지나치고 어떤 것을 들여다볼 것인가. 제각각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그 어떤 것은 달라진다.
결국 패싱의 기술은 '선별력'이다.
만남이 있을 때, 패싱을 비상약으로 챙긴다. 수다는 활동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만큼 자나 깨나 말조심은 기본이다.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는 말을 가려 쓰는 것은 쉽지 않으니. 은유가 지나치면 주제를 벗어나고. 직설적으로 내뱉은 말은 알게 모르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이래저래 제 갈길을 찾지 못한 말들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땐 그냥 웃거나(긍정) 침묵하는 것(부정)도 패싱의 한 방법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불멸할 줄 알았던 진리도 시대 따라 바뀌고 그 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격언은 아예 반대로 씌여지기도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로 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럽다’를 외치던 때가 엊그제건만 어느새 ‘오래 보면 피곤해진다’에 박수를 치면서, 노화현상 때문만은 아니라고 우기다가 오늘에야 인정하는 것은 패싱약효? 오늘 아침 주문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패싱’이다.
여세를 몰아 이 글도 패싱, 붙잡지 말고 흘려보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