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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Dec 26. 2023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여느 때와 같은 8시 알람소리, 비몽사몽 오늘 일정을 더듬어보니 시간 맞춰 나갈 일도, 나갈 식구도 없는 날이다. 서둘러 일어날 이유가 없으니 꾸다 만 꿈 정리라도 할 겸 잠시 눈을 감았는데.. 10분쯤 지났겠지 하고 시계를 보니 9시, 8시에 깨워주기로 한 아들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벌떡 일어난 게 언제 적 일이었을까). 눈이 내린다는 남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커피물을 올리고 원두를 갈고 빵과 토마토를 굽고 아들을 깨우고.. 여기까지는 매일 아침풍경, 오늘은 아랫층 선배가 준 크리스마스  슈톨렌과 눈 때문에 새벽 선(禪)을 거른 남편 커피까지 3인분을 준비하느라 몸은 부지런을 떨면서 입으로는 ‘일어나’ 노래를 부르고 푸념반 지청구반 ‘아들아, 이번생은 너 깨우다 끝나겠다’ (40년째 깨우는 중). 말하고 보니 진짜 그런가 살짝 서글퍼지려는 순간 ‘오늘은 당신하고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 남편의 말에 ‘오래 살고 볼일이네. 웬일?’ 사람 많은 카페에서 비싼 커피 마시는 것은 남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도 오고 할 일도 없어서’ 아귀가 맞지 않는 남편의 이상한 프러포즈에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생 저 생 하던 내 기분이  조금 나아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오늘 아침 아들과 남편의 묘한 캐미에 왔다 갔다 하는 내 기분. 역시 여러 사람이 모이면 가끔 해결책도 나온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편의점 커피만 마시는 남편의 평) 우리집 커피도 이미 마셨으니 카페행은 물 건너 갔지만 생각이라도 한 게 어딘가. 머지않아 실행의 날도 오려니.


아침을 먹고 그제사 창 밖을 보니 세상이 뿌옇다. 안개가 끼었나 했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침선을 거르게 한 눈이 미웠을까, ‘눈이 꾸역꾸역 내리네’ 남편의 말에 ‘꾸역 꾸역이 뭐야 펑펑 내린다, 펄펄 내린다 해야지’

지적질을 하고 다시 보니 천천히, 그칠 기미도 없이 함박눈은 '꾸역꾸역' 내리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눈까지 오고 난리야’

직설적이고 냉소주의자인 '올리브 키터리지’나 무감각이 일상사인 ‘오베’라면 ‘내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을 수도, 아니면 반대로 그들의 말에 내가 맞장구를 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도 부담스러운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질투와 부러움의 끝판왕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속, 못해본 것의 미련은 유효기간이 지난 값진 식재료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사실 우리나라의 명절도 졸업한 마당에 크리스마스라는 서양의 명절은 늘 생소하다. 멋진 장난감을 받았는데 어떻게 가지고 놀아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아이처럼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강 건너 불구경거리였다. 흔히 말하는 ‘내용 없는 축제’를 받아들이고, ‘이유 없이 즐기기’는 즐김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연배에게는 숙제 같지만 굳이 의미를 찾자면 세모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 달 전부터 나오는 캐럴송을 들으며 거룩하신 예수님의 탄생을 되새기기보다 한 해를 보내는 감회에 젖는 것이 그나마 크리스마스를 느끼는 나만의 방식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비록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겉과 달리 마음은 따뜻한 올리브 키터리지나 오베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을 추앙하는 나의 속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아침, 아들은 일찌감치 사무실 눈을 치우러 가고 동네 아이들은 플라스틱 눈썰매를 끌고 아파트 경사로로 달려간다. 우리는 거실창밖으로 꾸역꾸역 내리는 눈을 보며 오늘 나갈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잠시 러브스토리의 주제가를 흥얼거린다.

 

유독 사랑의 기적을 꿈꾸게 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깨어나기 싫었던 아름다운 꿈은 이제 그 자체 꿈으로 박제되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감사인사가 하나 더 생긴 하루, 소박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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