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선 Feb 20. 2024

올해 첫 야외 어반 스케치-이화여대.

-서울어반스케치 2월 정모-

   

두 해에 걸쳐져 있는 겨울은 계획 세우기 좋은 계절이다. 칩거의 겨울이 시작되면   바깥활동을 줄이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작업 계획을 세운다. 그러다 새해가 오면 당연한 듯 한 해 계획을 짜고, 어영부영 지키지 못한 계획은 구정에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된다.

그래도 실행되지 않고 있다면 3월 새학기가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교 방학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그리던 동그란 생활계획표, 말랑말랑한 뇌에 새겨진 습관의 잔재로 가끔 일정을 메모하기도 하지만, 매일 계획을 짜지는 않는다. 일상의 루틴이라는 고정 계획에 또 다른 뭔가를 끼워 넣으면 십중팔구 체증에 시달릴 테니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요즘은 월별, 계절별로 계획을 짠다. 어반스케쳐인 내게 야외 활동하기 좋은 봄, 가을과 은신할 수밖에 없는 여름, 겨울의 계획은 다를 수밖에 없고. 거기에 일 년 열두 달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은 나에게는 사계절이 아니라 거의 12 계절의 느낌이다.


그중 겨울은 내가 스스로 정한 동계훈련시즌, 스포츠 선수들이 겨울철 실내에서 훈련을 하듯 지반(집안) 스케치를 하면서 어반스케치의 근력을 키우기 위한 셀프미션이다. 이번 겨울 또한 밖에서 그리면서 미진했던 부분을 집에서 연습해 보리라 작정했는데.. 별로 한 것도 없이 어영부영 겨울이 지나고 있다. 사실 그림은 여느 겨울보다 많이 그린 것 같은데 내가 계획한 동계 훈련은 아니었다는 것, 이유는 같이 그릴 친구가 두어 명 생겼고 지구 온난화로 예전 같지 않은  겨울 날씨는 자꾸 밖으로 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외에서 한, 두 시간 앉아있는 것은 무리니 창밖뷰가 좋거나 실내에 그릴 소재가 있는 카페를 순례하며 어반을 한다. 그나마 십 년 만에 다시 시작한 누드 크로키로 동계훈련의 갈증을 풀고 있었는데, ‘서울어반스케치 2월 정모, 이화여대’가 떴다.


우리 집과는 초바운드리(초역세권의 벤치마킹)라 냉큼 신청자 명단에 올렸지만, 벌써 야외어반? 아직은 밖에서 그리기엔 추울 텐데 어디서 그리지? 걱정이 앞섰다. 이대나 연대같이 유서 깊은 대학 어반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을 그리러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화단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케쳐들을 보니 내 걱정은 기우였음이, 그 속에 비집고 들어가 그리고 싶었으나 너무 높아 매번 포기했던 계단 위 대강당을 그렸다. 여기서 그리면 될 걸, 적당한 햇살과 옆 스케쳐들의 온기, 반가운 인사, 역시 사람들이 모이면 답이 나온다. 생각해 보니 올해 첫 야외 어반이다.


                                                                                   

점심식사 후 진선미관(진. 선. 미, 똑같은 세 개의 건물로 되어있다)으로 이동, 건물만큼 이름도 엔틱 하다. 옆에서 그리던 선생님이 자기 학교 교훈이 진선미였다는 말에 웃음이 쿡. 그땐 여고생들의 최고의 덕목이었는데 요즘 애들은 그 단어를 알기나 할런지. 지금은 ‘글쎄올시다'. 장래 희망란에 ‘현모양처’라고 쓰기도 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격세지감, 그래도 건물이 멋지니.. 됐다.

오래된 건물과 ecc계단을 배경으로 졸사를 찍는 깨발랄한 졸업생들 사이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느라 몰려다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신입생들이 지나간다. 4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이토록 극명한 차이에 새삼 놀라며 또 그림을 쓰고 있는 나!


이대는 언제나처럼 이대생보다 외부인이 많다. 우리나라 근, 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대학의 캠퍼스를 개방하여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대는 몇 년 전  ecc가 생기면서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지는 경관으로 명실공히 스케쳐스의 성지가 되었다. 가까이 사는 나는 최고의 수혜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아트하우스 모모), 어반에 허기질 때 만만하게 찾아가기도 한다. 한두 장 그리다 배고프면 구내식당에서 학식을 먹고 오르락내리락 경사도를 따라 교정을 산책하는 재미는 덤이다.


         


눈으로 보기만 하던 ecc가 여러 스케쳐스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날,  멋진 작품들을 감상하며  ‘나도 다음에 그려봐야지’ 결심과 하게 하는, 이런 것이 정모의 맛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인생의 숫자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