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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Mar 16. 2024

어반 스케치 정모의 맛.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자타공인 어반 스케치 독립군 행세를 하고 다녔다.

여기서 독립군이란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혼자 그리러 다니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유와 현장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어반 스케치 특성상 대부분 모여서 그리지만 혼자 다니면서 그리는 스케쳐들도 많다 보니 독립군이 특별히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내 경우는 혼자가 좋아서라기보다 여러 사람들과 장소, 시간을 맞추기 힘들고 어느 정도 마음 맞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혼자 그리게 된 경우다. 가끔 같이 그리고 싶은 사람이나 모임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나름의 기반이 공고하여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혹시 불러 줄까, 슬며시 언질을 주기도 했지만 아쉬울 것 없는 그들에게 사회성 떨어지는 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을 두드릴 용기도, 꼭 그래야 하는 필요성까지 숙고하느니 그냥 속 편하게 혼자 다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몇 년간의 팬데믹은 내 독립군 행보에 외적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으니,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걷다가 지치면 그리고, 그리는 게 싫증 나면 또 걷고(여행하고), 자유로 포장된 외로움을 즐기면서 그림과 함께하는 혼행은 여행의 새로운 컨셉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탄생한 ‘가던 길 멈추고’. 조금 엔틱 하지만 그 말 외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으므로.


독립군이 힘든 것은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조율, 통제하고 때로는 적절히 타협도 해야 한다. 게다가 아군의 얼굴을 한 적군인 자기 합리화는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결국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이런 험난한 독립군 생활 중에도 꼭 챙긴 게 있었으니, 정기모임이다. 내가 만든 정모의 별칭은 ‘헤쳐 모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스케쳐들이 구령(?)에 발맞추듯 하나, 둘 모여든다. 친하지는 않아도 얼굴 보면 반가운 사이, 이름은 몰라도 닉네임만으로 소통이 가능한 사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궁금한 사이, ‘담 달에 봐요’ 사심 없이 인사하는 사이, 이런 ‘넓고 느슨한 관계’가 정모의 맛이 아닐까.  

   


그즐세(그림 그리는 세상) 정모날, 정모장소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풍경을 떠올리며 쓱싹쓱싹 머릿속으로 스케치를 해다. 박물관 마을은 몇 년 전 서울어반스케치 정모를 한 곳이라 눈에 그려질 듯 선하지만, 처음 가는 장소일 때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미리 검색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갔던 곳이라도 매번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계절과 날씨, 누구와 그리는 가에 따라, 무엇보다 그때와 지금의 내 그림 스타일에 따라 풍경은 다르게 해석된다. 같은 장소를 다시 가는 것은 좋은 영화나 책을 다시 보거나 읽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 지나쳤던 장면이나 대사, 문장이 두 번째에 보이면서 작품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더 깊게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전번에 아쉬웠던 부분을 만회하기 위한 욕심으로 더 어수선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처음에 너무 많이 그린 경우) 성의 없는 그림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썼듯이 어반 스케치는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이다. 그럼에도 나의 픽은 첫 번째보다 두 번째다. 어쨌든 그림은 진화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60~80년도 사이의 서울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서울 풍물시장의 ‘청춘 1번가’와 함께 옛 풍경을 도심에서 볼 수 있는, 스케쳐스에게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 어렸을 적에’이 ‘할머니 어렸을 적에’로 바뀌었지만).

햇살이 고운 가루처럼 흩날리는 주말, 스탬프에 진심인 아이들의 통통거리는 발걸음과 설명에 진심인 부모들은 우리의 풍경이 되어주고, 삼삼오오 모여 그림을 그리는 우리는 그들의 풍경이 되어준다.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 훈훈함은 정모의 또 다른 맛이다. 그러고 보면 나를 기다리는 것은 풍경뿐만 아니라 사람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까. 풍경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 풍경, 적게는 열 명 남짓 많게는 백 명이 참가하는 정모는 혼자나 두서너 명과 또 다른 장관을 만들 뿐 아니라 숫자적인 메리트도 있다. 각자의 이름표를 패용하면 소속감과 함께 뭔가 공인된 일을 하는 듯한 당당함을 느낄 수 있는, 이 또한 정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정모는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차려진 한 상,

‘오늘도 잘 그리고 갑니다’ 마무리 인사로 다음 달을 기약한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서일까. 오늘 봄볕이 유달리 따사로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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