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을 읽으면 알게 되는 것들
‘희곡 사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책방을 운영하면서 그럴듯한 이름이 붙은 모임이었지만, 불과 재작년까지만 해도 집 다락방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희곡을 읽었다. 희곡을 읽는 모임을 만든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희곡을 많이 알고, 많이 읽고 싶었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가장 손쉽게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방법이니까. 어쩌면 그게 연기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희곡 사이’에서는 모임을 하기 전에 희곡을 미리 읽지 않는다.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낯설게 바라보며 함께 공감하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미리 표현할 감정을 찾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감정은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니까.
연기를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과 희곡을 읽다 보면 이상한 감각이 들 때가 있다. 감각적으로 슬픔이 느껴지는데, 슬픔이라는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는. 서둘러 감정을 이끌어 내려다보니, 덜 익은 과일처럼 삼키기가 싫어진다. 일반인이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희곡을 자주 접하지 못했고, 소리 내어 읽는 것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은 미리 표현할 여유도, 그럴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게 감정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실제로 그들이 읽는 대사를 듣다가 눈물을 참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나는 감동과 반성을 동시에 하게 된다. ‘그렇지. 일상에서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이렇지.’ 슬픈 말을 해야지, 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뱉은 말이 상대나 나에게 슬픔이 될 줄 모른다. 이윽고 그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게 됐을 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를 때가 돼서야, 내가 왜 이러지 싶은.
희곡은 함께 읽어야 의미가 있다. 혼자서 아무리 1인 다역의 연기를 한다고 해도 서사를 만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명하게 어려운 부분이 될지 모르겠지만, 함께 읽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감각이다. 살아온 세월이 다른, 그야말로 캐릭터가 다른 인물들이 읽는 대사를 듣는 것은 그 순간에만 만들어지는 새로운 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굉장히 긴장한 채 읽기를 시작한다. 누구나,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 앞에서 소리 내어 글을 읽는 경험이 부족하니까.
누군가의 앞에서 혼자 글을 읽는다는 것은 벌을 받는 일이었을 테니까.
학창 시절, 당번이거나 당일의 날짜가 8일이기 때문에, 내가 하필 8번이기 때문에 읽어나서 교과서를 읽어야 했던, 그 작은 두려움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글을 더듬으며 읽기 시작하는 사람이 불과 3~40분 뒤에 이야기에 몰입되어, 평소에 자신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대사를 읽고 있는 것을 보면 배우라는 직업이 참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을 자각하고도 연기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희곡 읽기가 즐거운 이유는 읽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곡을 읽고 나서 나누는 대화는 정말이지 값지다. 누군가 겸연쩍게 이런 주제를 던져주지도, 평소에 이런 대화를 꺼낼 생각도 못하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시대와 문제, 고전을 읽으며 인간이 가지는 숙명적인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고양되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 순간은 오만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전히 희곡 읽기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사람이 많고, 모임이 성황리에 매진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재미있고, 삶을 충만하게 하는 놀이를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겨우겨우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이 모임은 2년 안에 예약 없이는 참여할 수 없는 핫한 모임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가까운 희곡 모임을 한번 찾아보는 걸 권한다.(요즘은 지역별로 모임이 한두 개씩 있더라.)
우리가 삶이라고 하는 것들은 차라리 어떤 순간, 장면에 가깝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를 가지는 어떤 순간들이 나열되고, 그것들을 관통되는 어떤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삶을 정의한다.
희곡은 그런 의미를 가진 순간들을 얇게 다져 노련한 작가가 양념과 함께 뭉쳐 요리한 함박스테이크다. 이른바 ‘삶’이라는 말씀.
겪어 보고 싶지 않은가? 다른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