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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민 May 21. 2020

흉터

2.모자란 건 나였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명절 때마다 사람이 북적였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명절마다 우리 집 문지방은 살을 내어줘야 했다. 할머니의 여섯 아들은 각자의 가정을 꾸렸고, 그 가정의 아이들은 나이도 성격도 가지각색이었다. 문지방이 닳아 반짝반짝 윤이 날 만도 했다.


 많은 사람 중에 나를 특별히 예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정이 누나라고 불렀던 사람이다. 둘째 큰아버지의 딸이지만, 그 집 사정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닌 터라 몇 번의 결혼에서 누구의 딸인지 소문만 무성했는데, 내겐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속사정일 뿐이었다. 다만 누나는 말이 조금 어눌했고, 가끔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나는 나대로 모자란 누나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일곱 살 꼬마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그때 살던 시골집은 구판장까지 30분은 걸어야 했다. 어린 사촌 동생을 데리고 다녀오는 길에 누나는 장님 놀이를 하자며 눈을 감았다. 원래 장님 놀이라는 것이 아이가 장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아이 같은 누나의 손을 쥐고 애늙은이는 앞장서기 시작했다. 길이 위험할 것은 없었다. 다만 나는 호기심 왕성한 일곱 살 아이였고, 내겐 보호해야 할 장님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의 통유리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장님은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물이 자박하고 몽돌이 깔려있는 곳에. 그리고 장님의 손에 딸려있던 아이는 뾰족한 바위 쪽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다행히 누나는 조금 긁힌 정도였지만 나는 턱과 손등이 제법 찢어졌다. 누나가 날 보며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던 기억이 난다.



 그 일 이후 누나를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몇 해를 누나를 잊고 지냈고, 제법 키가 커진 후에 누나를 만났다. 약간은 촌스럽지만 눈이 맑고 예쁘게 빛나던 누나는 없었다. 눈엔 빛을 잃었고,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는 누나를 피했다. 몇 년 후엔 정신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글을 쓰며 그동안 청산하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명치 언저리에 단단하게 뭉쳐서 여울이 진 것 같다. 비겁하게 가슴에 품기만 한 감정들을 언젠가 입 밖으로 토해낼 기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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