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일본어가 없어서 시작된 여행에서의 인연
며칠 전 다녀왔던 일본 여행 중에 신주쿠의 골든 가이라는 골목에 다녀왔다. 아무 계획 없이 걷기만 하던 터라 마침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온 지인이 ‘골든 가이’를 가보란다.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2~3평쯤 되는 정말 작은 바들이 50개 정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이다. 그저 그 골목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일본을 찾는 많은 유럽 국가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 같았다. 20년 전 태국 방콕의 카오산 거리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너무 일렀는지 비교적 한가했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 보니 어딜 들어가야 하는지 고를 수가 없었고, 나는 스테인 글라스로 된 예쁜 간판이 마음에 드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 안에 일하고 있는 두 분과 바 손님으로 앉아있는 일본인 셋이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서 걷기만 했던 터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는데, 위스키 한 잔을 시켜서 마시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인들만 모여있는 이 당연한 상황이, 이곳에서는 사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한두 시간 뒤쯤엔 온통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친구들이 골목을 가득 채웠으니까 말이다. 손님 셋이 당연히 일행인 줄 알았는데, 가운데 남자분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떠났다. 다들 이방인인 내게 은근한 관심이 쏠렸지만 도대체 일본어를 못하는 내가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할까.
‘토이레와 도코데스까?’
정말 유일하게 자연스레 나오는 일본어는 이 말 밖에 없었고, 아주 작디작은 화장실에 다녀왔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일본어를 동원했다. ‘간빠이’를 시작으로 두어 마디를 나누고는 정말 생뚱맞게도 ‘나마에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고서 여자친구와 장난치듯 뱉었던 대사였고, 심지어 문장이 채 되지도 못하는, 해석하자면 ’ 이름?‘이 될까?
슌(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슌’이 맞을 텐데, ‘슝’하며 비행기 흉내를 냈던 내가… 내 자신이…), 호노카, 미유, …
말도 안 되는 내 일본어 한 마디에 서로가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우리는 급속도로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도저히 내 일본어 실력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어서 파파고 앱을 열었고 기묘한 대화 파티가 시작됐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내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고 말하고, 번역된 소리를 함께 듣고, 웃고, 다시 다음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내 휴대폰을 들고, 말하는 식이었다. 얼마나 우스운 상황이었나 생각하게 되지만, 이 여행 첫날의 기적 같은 만남이 내 텐션을 머리끝까지 올려놓았고, 나머지 여행도 즐거이 다닐 수 있었다.
왜 그 시작이 이름이었을까? 이름이 뭐길래. 이름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길래.
내겐 이름하면 떠오르는 것은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김춘수 시인의 ‘꽃’, 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정도가 있다. 정말 많이 읽었던 시지만 그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다. 이 책은 사실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읽게 된 책이었지만, 저자는 뇌신경과학자였고 내용은 뇌의 기억과 반응 패턴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어에 따라서 감정이 만들어진다. 가령 명명되어 있지 않은 감정은 우리가 느낄 수 없다는 논문이 소개되는데, ‘정’이라는 감정은 우리나라에만 있듯 각 나라마다 고유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명명한다는 것은 그것의 개념을 이해하고 공론화한다는 것이다. 명명된 것은 개념화되고 개념화된 것은 기억된다.
‘나마에와’는 표면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단어지만, 이름을 묻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지금부터 당신을 포함한 그 시간을 기억하겠다.’이다.
애칭이나 별명은 너와 나, 혹은 우리의 특별한 시간과 의미를 기억하게 하고 그 감정까지 개념화된다. 너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혹은 일상을 여행처럼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라. (*김춘수 ‘꽃’의 내용 중 인용)
다른 시간 차원의 인연이 만나게 된 것처럼, 혹은 낯선 여행지에서 누군갈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