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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소 Oct 26. 2016

미니멀리즘과 “자신”으로의 귀환

2015/02/05 _ 사사키 후미오 블로그 번역

출처: http://minimalism.jp/archives/382


어제, 일이 예상 이상으로 순조로워, 시간이 생겼으니 누마하타상에게 연락하여, 저녁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예전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다. 상대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과도하게 상상하여, 신경이 쓰여 “당일 연락하여 만난다”는 것을 내가 먼저 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더욱 충실하는 것, 이 지금의 테마 중 하나가 되었다)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물론, 미니멀리즘에 대해서다. 그것은 정말로 자극적이었다.
 
누마하타상과 한 지금까지의 대화는, 누마하타상이 자세히 알고 있는 해외의 최신 라이프 스타일이나 신철하고 있는 컬쳐에 대해, 내가 네네하여 그저 듣는다.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자극받는 일이 많이 있어도, 그것이 자신의 무언가와 확실히 이어져, 내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발언하는,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젯밤은 그렇지 않았다.(녹음기를 썼으면 좋았을텐데.)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다, 던가 들어줄 수 있는 이해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다, 라던가 슬슬 나의 이야기도 들어주었으면 한다, 던가 쓸데없는 “욕구”가 대화에 들어있지 않았다.
 
 
 
서로가 모르는 것을 바르게 교환한다. 같은 것을 생각한 것에 놀란다. “대화”라도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미니멀리즘을 의식하게 되고 나서, 머리속에 있던 “아지랑이”가 조금씩 개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사고가 분명해지고, 오감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까지는, 계속 교양학부에 있던 것이었다라고 생각한다.
 
 
 
명작이니까 읽고, 이미 인기가 있는 것을 보고 들어왔다.
 
위대한 누군가에 대해서. 그리고 위대한 누군게에 대해서의, 위대한 비평가의 의견에 대해, 공부해왔다.
 
 
 
그것을 지식으로서 알고는 있어도, 나 자신이 생각한 것은 아니기에 금방 머리 속의 서랍에서는 꺼낼 수 없다. 자신의 피와 살이 아니니까, 대화에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상대의 얘기를 그저 이해하도록 힘쓰고 있을 뿐이다. 바보라고 여겨지고 싶지 않아, 입을 닫는다. 발언하는 기회가 적으니까, 점점 대화가 서툴러진다.
 
 
 
그것이 조금씩 바뀌어간다고 느낀다. 물건을 미니멀하게 할수록 타인의 시선이 신경쓰이지 않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을 위해 무슨 물건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물건을 미니멀하게 하는 과정에서, 정보에 대해서도 미니멀을 의식하게 되었다. SNS는 원래 하지 않았다. 지금은 쓸데없는 뉴스도 가십도 좋아했던 오와라이(개그) 방송도 나에게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타인이 만든 것이나, 타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해설하지 않는다. 타인의 목소리가 아닌,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믿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의 귀환이다.
 
 
 
누마하타상과 얘기하며 가장 놀란 것은 두사람이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를, 최근에는 별로 보지 않게 되었다. 라는 것이었다.
 
 
 
예전의 나는, 뭔가 몸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러고보니 당분간 영화를 보지 않았구나, 라는 것이 짐작이 간 적이 있었다. 자극이 있고, 감동할 수 있고, 깊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문제를 잊을 수 있는 2시간이, 나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물론 지금도 매우 좋아한다. 단지 조금 접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보지 않은 명작이 많이 있으니까, 공부를 위해 본다. 어찌됐든 많은 양을 본다. 영화 매니아를 자칭하고 싶고, 영화 매니아와 만났을 때는 그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봤다라는 경쟁심도 샘솟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영화는 그렇게 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잊고 싶었다. 지금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테마에 관한 영화를 고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 싶은 영화만을 본다. 고르는 것은 이 쪽이다.
 
 
 
위대한 것들이 이미 다 나와버린 탓에, 자신도 모르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버린다. 생각이 떠오른 아이디어가 이미 선행되어진 것을 알고 거기에 서서 움츠러져버린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실패하는 것에 민감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생각을 떠올린 것이 자신이었다는 이유로 포기해 버린다.
 
 
 
위대한 타인의 대해서의 해설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것은 서투르더라도, 나 자신이 시작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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