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변화가 두려운 나
"나의 세계는 작은 뒤틀림으로 넓어진다. "
일상에서 작은 변화가 나의 삶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그게 세계를 뒤흔들지 않는 이상 작은 뒤틀림은 삶을 찾아온 행복이자 기회이다. 그렇다고 그게 편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복이자 기회는 긍정적인 느낌을 주기에 받아들이는 나도 그걸 느끼는 시간도 모두 밝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걸 억누르며 괜찮다고 되새겼다. 이건 기회야. 좋게 받아들여야지. 왜 불편한지 생각하지 않고, 감정을 마음 한편으로 치웠다.
불편한 게 당연한 일인데. 편한 게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감정과 분위기를 정해놓고 나를 맞추었다. 내가 느끼는 걸 보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는 걸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이 불편한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라며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오는 자극에 집중하면서 내면에서 울부짖는 감정은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한다고 뒤틀림이 사라지고 삶이 단조로워지는 게 아닌데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것과 긍정적인 이미지는 함께 갈 수 없었다.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건 시간도 걸리고 힘이 든다고 정의했다.
내 사전 속에 적혀있는 의미가 뒤틀리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걸 선택했다. 외면받은 감정은 차곡차곡 쌓였다.
하루하루 쌓여온 감정이 터지자 내가 무너졌다.
내가 적어놓은 의미들이 사라졌다.
잡아보려 손을 뻗어보고 허공에 소리치며 화를 냈지만 어느 것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안 되는 데.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졌다.
뒤틀림을 받아들이지 말걸. 그저 뱉어냈으면 나는 안전했을 텐데. 우리는 함께였을텐데.
더 이상 나를 보호하던 빛들이 보이지 않았고, 온기를 나눠주던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온몸이 아프다. 춥고 어둡다. 울고 싶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
그냥 눈을 뜨고 싶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냥 하고 싶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나는 무너지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나를 감싸던 세계가 달라졌을 뿐이다.
과연 나는 뒤틀림을 원했던 것일까? 원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 뒤틀림이 나의 세계를 뒤집는다면? 나는 과연 그 뒤틀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 받아들이고 싶긴 한 것일까?
새는 알을 깨고 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의 틀을 벗어날 수 있어야 비로소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나는 과연 내 세상이 넓어지는 바라는 가. 넓어졌으면 좋겠다. 세상을 더 품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어떠한 노력도 어려움도 없이 스르륵 넓어지면 좋겠다. 세상 일이 아프지 않고 쉽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건 내가 가지고 있던 시선이, 의견이 무너졌다는 게 아닐까. 그동안 단단히 쌓아 올렸던 첨탑 위에서 망원경을 놓아야 비로소 그 위에서 보이는 넓은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 내가 가진 망원경이 이 작은 렌즈로 보는 세상이 전부이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이 넓어지는 걸 바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망원경을 내려놓는 것? 아니면 그저 내가 더 많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내가 가진 시선들이 옳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망원경을 내려놓을 수 있기는 할까. 더 많은 망원경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사람들은 일관되게 행동하고자 하는 심리적 압박을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가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일관적인 사람이고 한결같은 사람이고자 한다. 그게 긍정적인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입체적인 면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일관적이지 않으면 가짜라고 진짜가 아니라며 채찍질했다. 일관적이라는 형용사를 나라는 사람에게 붙였더니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없는 걸 원했으니까.
이제는 그 형용사를 떼어 목표에 붙여보려 한다.
"오늘을 잘 살아가자"
오늘이 어제 같지 않아도,
내일이 오늘 같지 않아도
망원경도 내려놓고 첨탑 위에서 보이는 것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2020년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