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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O 지나친 조각들 Dec 07. 2020

나의 세계는 작은 뒤틀림으로 인해 조금 더 넓어진다

나의 취향이란 건 - 커피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 있다. 왜인지 모르지만 머릿속에 이런저런 질문들이 공처럼 솟아오르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온갖 물음표가 달려든다. 오늘이 그렇다. 골대 앞을 지키던 골키퍼처럼 하나라도 붙잡아 보려고 노트북을 켠다.



한 동안 일상에 대해 지루함과 무료함이 찾아왔다. 바쁘게 채찍질하며 결승선만 보고 달려가다가 막상 그 선을 넘고 보니 허무했다. 생각보다 특별하지도 않았던 날들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단 말인가. 달려오던 그 시간들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인생은 한 단면이 아니라 연속된 사건들로 이어져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살았다. 버텨내는 혹은 살아가는 이 순간은 삶이라는 굴레를 굴리는 과정에 있다고. 그렇다고 모든 게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닌데. 대단하고 큰 의미가 아니어도 모든 순간이 다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며칠 전에 일기장에 적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는 이 시간들이 갑자기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처럼 다가왔다. 그토록 원했던 안정적인 시간들이 왜 이렇게 느껴졌을까. 쳇바퀴도는 일상을 위해 그렇게 이를 악물고 노력하지 않았나. 이 일상을 무너뜨리고 싶은 건 아닐 텐데 지켜내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건데... 몸을 움직여야겠다. 의자에서 일어나 한 시간 정도 땀을 쭉 빼고 샤워를 마치고 아이스커피 한잔을 내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심각하게 나를 옭아매던 질문들이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이 자취를 감췄다. 아무래도 내 뇌는 몸을 이기지 못하나 보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공간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게 뭐가 있을까. 작은 뒤틀림은 그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한 개인의 취향이라는 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 여행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담아낸 기억이 담겨있기도 하다. 때론 옮겨가기도 한다. 조금씩 뒤틀리면서. 나의 세계는 작은 뒤틀림으로 인해 조금 더 넓어진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가 그렇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좋다.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는 아이스커피를 밖에서 사 먹을 수 없어서 절망했다. 물론 파리에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다만 난 프랑스에 4년 정도를 살았지만 파리에 살기 시작한 건 8월부터였기에 이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테라스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한 커피를 홀짝이는며 울상 짓는 내 모습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이건 벌이야. 돈 쓰지 말라는 계시가 분명해.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얻어내는 게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어딜 가든 구체적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니까. 처음부터 나에게 맞는 주문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끝에 나에게 맞는 구체적인 주문 방법을 찾았다.


"아이스 카페 알롱제 주세요."

미지근한 물 가득한 커피가 나왔다.


"아이스 카페 알롱제에 얼음 띄워 주세요."

미지근한 물 가득한 커피에 얼음 하나가 띄워 나왔다.


Frappé(흔드는 것)를 원하냐기에 오 너무 좋다며 승낙했다.

칵테일 만들 듯이 커피를 흔들어 얼음 없이 잔에 담겨 나왔다.


"카페 알롱제 하나랑 따로 잔에 얼음 좀 주실 수 있나요?"

아 이거면 됐다 싶었다. 커피잔이랑 유리잔이 나왔다.

다만 작은 유리잔에 얼음 하나만 있었을 뿐.

역시 쉽게 되는 게 없다. 앞으로 "가득" 채워달라고 해야겠다.


물론 파리라고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딱 나왔던 것도 아니다. 작년 여름에 파리에서 인턴 할 때 passy 플라자에 Columbus Café가 입점을 했다. 스타벅스 같은 커피 체인점이다. 룰루랄라 점심시간에 20분을 걸어가 들뜬 마음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비록 2주 남았지만 그동안 이곳에서 행복을 찾겠구나 하면서. 서버가 카페 알롱제에 얼음 넣어서 주면 되는 거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 느낌이 왔다. 미지근한 물 가득한 커피에 얼음 하나 띄워 나오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커피 알롱제를 내리고 컵에 얼음을 가득 채운 다음에 그 위에 내린 커피를 부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하는 것 맞냐고 나에게 얼음을 담으며 물어보던 서버와 oui oui merci très bien (네 네 완전 최고예요!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끄덕이던 내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춤추고 싶은 걸 참고 고맙다며 좋은 하루 보내라며 인사를 했다. 참 완벽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조금씩 수정을 하며 몇 년에 걸쳐 나에게 맞는 주문 방법을 찾았다. 친구들도 처음에는 경악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커피는 더러운 물이라고 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마음이라며 혓바닥을 내뱉었다. 이제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하지 않으면 왜 주문 따로 안 하냐며 궁금해한다. "우리는 테라스에 있고 지금은 겨울이니까. 추워. 따뜻한 거 마실래. "



프랑스에 살면서 대부분 집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커피 머신을 샀고, 얼음을 얼렸고, 내 입맛에 맞게 캡슐을 찾아갔다. 이 유리잔에 담긴 건 온갖 커피를 달고 살다가 찾은 내 취향인 것이다. 고등학생 때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였고, 대학교 새내기 때는 아이스 라떼였다.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생명수처럼 벌컥 들이키기도 하고 아무 힘도 나지 않는 날은 무슨 맛인지 아무 생각 없이 입 안에 흘러 넣기도 한다. 때론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빨아 당긴다.



스타벅스 주황 캡슐을 내렸을 때 그 첫 행복이 잊히지가 않는다. 혀에 느껴지는 맛이 기억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기차 타고 짐을 옮기며 이사를 할 때, 32도까지 올라온 날 큰 캐리어와 백팩을 짊어지고 파리에 도착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 한 모금.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그 순간. 그 날을 다시 혀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그 고된 날들을 겪지 않아도 그 감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쁜 마음으로 매일 아침 같은 커피만 마시다 보니 혀 끝에 닿는 맛에 익숙해졌고 반짝임은 더 이상 없지만 주황 캡슐은 일상에 스며들었다.



하루는 카르푸 셀렉션 에티오피아 예거 치프 캡슐을 샀다. 물론 주황 캡슐도 담았다.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는데 한국에서 예거 치프라는 이름을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기에. 별생각 없이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르니 내 방이 고소한 커피 향으로 가득 차오른다. 4년간 함께한 리디북스 리더기를 펼치고 눈은 글자에 고정한 채 오른손으로 차가운 컵을 잡았다. 한 모금.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들어 커피잔을 응시한다. 할렐루야. 찾았다 내 사랑. 한국 카페에 있는 기분이다. 이런 게 작은 행복인 걸까. 입가에 미소가 담긴다.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무엇이든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때론 같은 커피라도 그저 그런 맛이 난다. 아침에 눈을 뜨기 위해, 일을 하기 위해 카페인을 채워 넣는 기분이 든다. 어제는 눈을 뜨게 했던 그 맛이 오늘은 느껴지지 않는다. 몰아치는 스트레스에 몰려드는 압박감에 짓눌리는 날이 그렇다. 아 내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그걸 되돌릴 생각은 감히 하지 않는다. 그럴 힘도 없다. 해야 할 일들에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저 오늘은 좀 더 힘든 날이구나라고 받아들일 뿐이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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