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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O 지나친 조각들 May 12. 2020

인턴도 재택근무가 되나요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4번째 인턴. 처음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프랑스는 전국 봉쇄령이 시작되고, 나도 캠퍼스에 갇혔다. 3월 말 수업을 마치고 파리로 이사해서 4월 말부터 인턴을 시작하기로 했던 일정이 바뀌었다. 4월 27일. 6개월 R&D 인턴으로 첫 출근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내리는 그 날. 내 책상으로 출근했다.


학사 때 2번, 석사 중 2번.

한국에서 2번, 프랑스에서 2번.

아마도 마지막일 4번째 인턴.


첫 번째 인턴, 추워서 몸이 떨리는지 긴장돼서 떨리는지 모르겠는 어느 한 겨울날에 불편한 정장을 차려입고 30분 일찍 첫 출근을 했다.

동기가 20명이라 복작거렸다. 자리도 부족해서 3명이 쓰는 책상을 인턴 넷이서 붙어 앉았다. 번역하며 낄낄거리면서 웃고, 지각하는 날엔 서로의 컴퓨터를 미리 켜주고, 야근하는 동기에게 초콜릿을 건네고 신나서 뛰쳐나가기도 했다.



두 번째 인턴, 첫 출근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셋이서 오손도손 보냈다. 세 달은 혼자였지만 동기 두 명이 들어오면서 함께 이태원을 누렸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내 모니터를 다 볼 수 있는 자리. 나는 우리 팀을 볼 수 없지만, 우리 팀은 나를 볼 수 있는 장소.



세 번째 인턴, 큰 캐리어를 끌고 기숙사로 향했다. 당장 열쇠를 줄 수 없다는 말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되는 마음을 떠 앉고 로비를 서성였다. 12시까지 출근이었지만 못 가겠다고 오후 2시까지 가겠다고 사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1시. 오늘 첫 출근이라 지금 가야 한다고 캐리어를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역으로 가서 스타벅스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정신없이 출근했다. 사원증 사진도 찍었는데, 정신없어 보이는 멍한 표정이 그 날을 담고 있다. 네 집이 더 중요하다고 4시에 얼른 가서 해결하라는 말에 감동받았던 기억. 열쇠를 받고 얼른 마트로 가서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워 넣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걱정이 태산이고, 힘들고 온 몸에 땀이 흐르던 그 날.


혼자 오피스를 썼다. 오피스 유목민으로 3번이나 자리를 바꿨다. 휴가 간 사람들의 공간을 떠돌면서 홀로 자유를 누렸다. 닫혀 있는 방에서 혼자 일하는 행복을 만끽했다. 사수를 만나려면 건물 반을 걸어가야 했고, 미리 약속을 잡지 않고서 내가 있는 오피스를 두드리지도 않았다. 점심은 같이 먹지만 각자의 공간이 보장된 생활.



네 번째 인턴, 내 책상으로 출근했다. 혼자다. 오피스를 공유하는 사람도, 같이 점심을 먹을 사람도, 모니터를 쳐다볼 사람도 없다. 9시에 사수와 영상 통화를 했다. 아이가 두 명이 있기에 이른 아침과 이른 오후만 접속한다는 사수는 직접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재택근무로 인턴을 시작할 줄이야. 연구소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6개월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17편 논문이 눈 앞에 있는데, 집에는 프린터가 없다. 파스텔톤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검은색 볼펜으로 써내려 가던 게 벌써 그립다. 모니터를 향해 목을 쭉 빼고, 마우스로 밑줄을 긋고, 워드 파일로 정리하며 읽는다. 생소한 분야라 처음 보는 단어들로 가득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한 번에 이해한 적이 있었나. 내일 다시 읽고, 모레 또 읽으면 된다. 생경한 문장들이 흩어진 논문의 숲을 거닐다 보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고 믿는다. 읽는 만큼 내가 그려낼 수 있는 게 달라지겠지.



답장을 보내야 할 메일 50통이 쌓여 있지도 않고, 갑자기 피피티를 번역하거나 페이스북 댓글을 손으로 긁어모아야 하지 않아도 된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분명 너무나 익숙한 공간에 있는데 낯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긴 호흡으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내 호흡으로, 내 책상으로, 내 노트북으로
오늘 처음 출근합니다.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https://brunch.co.kr/magazine/chuckchuck


*이전 글 :

https://brunch.co.kr/@jijo/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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