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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y 22. 2023

돌아보면 멈출까 봐

시애틀에 있는 회사로 입사가 결정된 후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미국 진출의 꿈을 이루어 냈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 미국 진출을 결심하고 꿈꿔왔던 장소는 시애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UX디자이너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시애틀이라니.


하지만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현지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 본 결과 시애틀로 가는 것이 괜찮은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첫째, 시애틀은 실리콘밸리 다음으로 소위 Big tech 기업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내가 일 하게 될 회사, 아마존의 본사도 시애틀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그러한 이유로 일자리가 많아서 최근 미국 내에서 뜨고 있는 장소이며 타 지역으로부터의 많은 이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실리콘밸리의 살인적인 물가 대비 조금은 더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소득세(income tax)를 내지 않아도 되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런 이유로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시애틀로 이주한다고 한다)

넷째, 한인 커뮤니티가 제법 크게 형성되어 있다.

다섯째, 자연환경이 훌륭하고 (비는 많이 오지만) 아이들 키우기에도 교육 환경이 좋다.


그래, 생각해 보면 단지 시애틀이기 때문에 안 갈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거기서 일 하다가 나중에 원하면 실리콘밸리에 있는 다른 회사로 또 이직하면 되죠.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문제지 미국 안에서 다른 주로 움직이는 건 일도 아니에요.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따라 그렇게 옮기곤 해요.”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시애틀로 가기로 한 내 결정에 대한 부담이 덜어졌고 조금은 더 편한 마음으로 오퍼레터에 사인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참에 기왕이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장소로 가는 것이 오히려 이 도전에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그 장소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이유와 계획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시애틀로 가자.


그곳에서 나와 내 가족의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




오퍼레터에 사인을 한 뒤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기까지는 대략 3주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맙소사! 3주밖에 시간이 없다니!”


하지만 갑자기 그 3주 안에 한국에서의 지난 40 몇 년간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아내와 상의 한 끝에 내가 먼저 시애틀로 건너가서 몇 달간 생활하면서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는 마음이 너무나 분주해졌다.


일단 나는 다음날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퇴사를 처리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퇴사를 통보하게 되어 함께 일하던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모두 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수많은 격려와 축하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회사 출근 마지막 날 익숙했던 회사 건물을 나오면서 뭔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나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내가 몸 담았던 이 회사를,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직업인 UX디자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 나는 꿈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내가 가지고 누려 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낯설지만 더 큰 세상에서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때는 내가 내린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범벅이 된 감정들만이 가득했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정신없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 당분간 못 보게 될 지인들과 만나 인사하고

떠나고 나면 생각날 것 같은 단골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그리운 서울의 거리를 걷다 보니

3주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지나갔고

어느덧 나는 인천공항의 출국장에 큰 짐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 의자에 앉아

평소에 좋아하던 노리플라이의 ‘여정’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사랑했던 모든 순간

아득한 물결 너머로

멀어져 간다

돌아보면 멈출까 봐

더 멀리 가야만 해

날 부르는 그곳으로


이 노래의 가사들이 그날 왜 그렇게 마음속에 절절하게 꽂혔던 걸까.


이 가사는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는 혼자만의 착각을 하면서 도전의 길을 나서는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이 노래가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 돌아보지 말자.

내 인생은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나는

40대 중반이라는

다만 그 숫자에 불과한 나이라는 한계를 내 인생에서 지우고

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

태평양을 지나 미국 시애틀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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