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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머니 May 28. 2023

중고차 딜러와 아메리카노

나는 큰 짐가방 두 개와 배낭 하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회사에 출근하기까지는 5일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어떻게든 이 낯선 나라와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세팅을 해 놓아야 했다.


일단 먼저 시애틀의 동쪽 지역에 위치한 벨뷰라는 동네에 방 2개짜리 작은 타운하우스를 렌트했다.

몇 달 후 가족들이 오게 되면 살다가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 될 테니 여러모로 그 집은 당장 혼자 지내기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동을 위한 차를 샀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당연히 시간을 두고 차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등등 여러 가지를 신중하게 고려했을 테지만 그 당시의 내게는 그런 것들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졌다.


그냥 저렴하고 잔고장이 없는 차.

그래서 차 때문에 사소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차를 사는 것이 그 당시 내게는 유일한 고려사항이었다.

다행히 연식은 좀 되었어도 그 조건을 충족하는 중고차를 발견하여 바로 구매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차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나를 담당한 딜러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그가 90년대에 NBA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한 이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젊었을 때 농구를 좋아했고 TV에서 NBA 경기도 자주 보곤 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과거에 그리 유명했던 선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구글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그 당시 그가 선수시절에 활약하던 이미지들이 나왔다.

(심지어 그중엔 경기 중에 상대팀 선수로 마이클 조던을 마크하던 사진도 있었다!)


미국에 온 지 이틀 만에 왕년에 NBA 선수였던 사람을 만나다니.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뭔가 짠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유명하지 않은 선수였다고 하더라도 NBA에서 선수로까지 뛰었던 그는 왜 지금 여기서 나에게 중고차를 팔고 있는 걸까?

도대체 그동안 그의 인생엔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다만 뭔가 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사인을 요청했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사람 일이란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가장 급했던 이 두 가지를 해결한 후에는 생활에 필요한 이불, 매트리스, 그릇, 냄비와 같은 생필품들을 구매했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장을 보며 여러 가지 식료품들을 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집에서 따뜻한 국과 밥을 지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 밥을 해 먹으면서 느꼈던 행복감.

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그리 거창한 것도,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당시 나에겐 작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였다.


왜 이곳 사람들은 “톨 아메리카노(Tall Americano)”라는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일까?


나는 톨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마다 매번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점원에게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처음엔 특정 점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매장에서 주문할 때도 역시 동일하게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결국 이건 나의 영어 발음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Tall”에 대한 영어 발음은 “톨”이 라고 하면 현지인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대충 센스 있게 알아 들어주면 좋으련만.

현지인들에겐 내 어색한 발음이 전혀 다르게 들리나 보다…


오히려 “털 아메리카노”라고 하면 100% 알아듣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헐. 뭐야. 털 아메리카노라니.

 

왠지 그 상황이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의 부족하고 어색한 영어발음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그렇게 지내다 보니 5일이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그렇게 꿈에 그리던 미국 회사인

아마존으로의 첫 출근 날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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