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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Sep 29. 2018

객관화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협성 독서왕 공모에 참가했었다. 원래 해당 공모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지만, 교수님께 선물 받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공모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읽어보니 좋은 책,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선물로 줄 만큼, 그리고 그 선물에 고마울 만큼 괜찮은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들을 글을 쓰며 정리했고, 공모에 참가했다. 입선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부족한 글이며, 언제까지나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다.


사실 아무도 궁금하진 않겠지만 요새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새가 없다. 아쉽다.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도, 수상이라는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럼에도 내 글이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갈 정도의 글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의 고민과 애정이 나에게 준 여운이 남아있어 여기에라도 올리기로 결정했다. 나 역시 나 자신의 글을 다시 한 번 곱씹게 되는 기회라고도 생각하며, 언젠가는 더 좋은 글을 쓰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언젠가는 나 자신에 대한 막연한 확신이 보다 단단한 확신으로 변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년 여름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리라 생각해도 쉽지 않았다. 자주 속이 좋지 않았고, 몸은 늘어졌다. 와중에 찾아온 불면증까지 겹쳐 일상은 몽롱해졌다. 그렇게 겨울까지. 병원에 가봐야 소용이 없으리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대신, 나는 글을 썼다. 내가 기억하는 삶의 첫 부분부터 되짚어가며, 묻어두었던 일들을 파헤쳤다. 그렇게 나는 어떤 이유들을 찾았다. 구구절절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어떤 이유들을 말이다.


사회역학은 이렇듯 질병의 ‘원인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요인, 즉 사람들의 질병 속 숨겨진 상처들을 발견하려는 학문적 작업이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만성질환이 된 가난, 청소년기의 왕따 경험, 자연재해, 낙태, 성과사회가 낳은 비정상적 노동환경, 실업과 고용불안, 소수자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 등의 사회적 요인이 담겨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딜레마로 환원시키거나 당장에 어쩔 수 없다며 유예한다. 보여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사회적 타자들의 고통은 그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죄책감도 견디기 어려운데, 자신조차 알 수 없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느껴야 할 고통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끝내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그저 덮어두고 견뎌내는 삶은 자신도 모르는 새 비극을 향한다.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불안, 절망이 일상이 된 이들의 삶. 비극은 우울감을 부르고, 우울감은 삶을 좀먹는다.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헤매임은 심장병, 뇌 기억 중추 손상, 인식 감퇴 가속화, 뇌졸중 등의 신체적 위해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으며, 그 극단의 형태는 ‘자살’,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행위에까지 이른다. 비단, 우리 사회가 망각한 고통이 과연 이뿐일까. 


그렇다면 ‘원인의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비극을 만드는 사회적 요인은 또 무엇으로 인해 생겨난 것일까. 왜 누군가는 대대로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에게 따돌림과 차별을 받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그렇게, 누군가의, 나의 삶은 왜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겨우내 쓰던 글의 말미에서 나는 답할 수 없음을 알았다. ‘원인의 원인의 원인’은 그 자체로 나에게 주어졌고, 지나간 시간 속에 고정되어 바뀌지 않을 것들이었다. 모든 삶이 비극일 수는 없지만, 그래서도 안 되지만,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삶은 필연히 비극이 될 수도 있음을, 그때 알았다.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정치적 환경은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책에서 인용된 크리거 교수의 말처럼 끈끈한 ‘그물망’이 되어 나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이렇듯 비극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내면에 감춰진 고통은 사회역학의 전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온전히 개인의 책임일 수 없다. 그 책임이 아무리 마땅해 보여도 우리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쉽게 단죄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 역시 필요하다. 누군가의 삶을 위협하는 견고한 사회적 요인들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우리’만이 타인의 고통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누군가의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삶의 다양한 요인들을 직시하고, 함께 맞서야 한다.


저자 김승섭은 자신의 학문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성적으로 ‘실증’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많은 책 중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지했던 독자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며, 아무리 적대적인 독자라 할지라도 이 책 속에서 ‘객관화’된 타인의 고통을 쉽사리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쏟아지는 비를 멎게 할 수 없다면, 함께 그 비를 맞아야 한다.”저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며, 이를 통해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타인의 고통을 유발하는 사회∙정치적 요인들의 불합리한 그물망을 촘촘한 논리로 지적하며, 그것을 끊어내야 함을 독자들에게 설득한다. 


한데, 우리를 둘러싼 고통은 이미 임계치를 넘긴듯 하다. 그 고통들과 일일이 마주할 수는 없기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일상적으로 외면하며 살아간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에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라도 하는 것보다 나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많은 글 역시 마찬가지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사례에서 저자 역시 자문하듯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계량화하여,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고통을 재단한다. 심지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행위를 합리화하기도 하며, 동정과 연민으로 전락한 몇몇 시도들을 비판하는 것은 쉽기까지 하지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의문은 끝없이 되풀이된다.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감’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아는 자만이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바로 여기서 무력감에 닿는다. 누구도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타인의 고통을 필요로 하는 공감은 그 자체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통 역시 그 자체로 공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지난 겨울 학기에 아예 글을 쓰는 수업까지 들었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의 자살, 부모님과의 불화, 소수자로서 겪는 차별 등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불행은 제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처럼 말이다. 이렇듯 모두의 삶에 비극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비추어 자신의 삶은 온전하리라 생각하고, 그 반대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타인이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누구의 삶도 온전하지 않다. 다들 어딘가 망가져 있지만, 할 수 있는 한 덮어두고 살아간다. 고통의 범람 속 고통을 타자화하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자신의 고통마저 타자화하기 쉽기에.


떠올려보면 우리는 즐거움보다 슬픔에 더욱 절절하기도 하다. 희극 역시 삶의 고통을 해학으로 승화하며 비극을 강조할 뿐이다. 즐거움과 ‘우스움’을 구분하지 못한 희극은 조소를 받고, 그중에서도 더욱 절절할 수밖에 없는 것, 우리 삶에 때때로 찾아오는 기쁨을 압도하는 슬픔에 온전히 천착하는 극만이 비극이라 불린다. 그리하여 희극은 그저 비극의 다른 형태로서, 하나의 삶이 담긴 연극을 이르는 일반명사가 된다. 이처럼 ‘연대’의 토대가 되는 ‘공감’은 우리가 공유하는 필연히 비극인 삶,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단지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의 공유로부터 비롯되는 이 공감을, 우리는 어떻게 연대로서 발현할 수 있을까. 고통을 삶의 본질로 보았던 쇼펜하우어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삶의 의지로 환원시켰다. 내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일상적으로 노력하며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모진 겨울, 나 자신의 삶을 한 번 파헤쳐본 경험 덕이라 생각한다. 쉽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글들을 쓰면서도 수없이 숨을 골랐다. 그래도 그 덕에 조금은 나아졌지만, 비극에서 온전히 벗어날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고통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절대 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수업에서 접했던 다른 학생들의 불행은 아직도 나에게 선연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 삶의 비극적 성격이 다시 한번 강조되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의 고통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고통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는 매몰되어 있는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무언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막연하고, 심지어는 안일한 답이라고 해도 좋다. 진정한 공감은 바로 그 자발성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역학자로서 비극을 유발하는 한국 사회를 진단했다. 연민과 동정을 배제하면서도 누구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말이다. 이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진단도, 처방도 부족하다.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연대의 특징은 소외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신자유주의적 태도와 정상/비정상의 범주가 일상화되어있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공감은커녕, 자신을 돌보기에도 버겁다. 각자의 세계로 고립되고 있는 우리의 아픔은 서로 만나 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척이는 길 위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가 손을 내밀게 된 연유를 걱정하면서,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누군가가 잡아주기를 바라는 한 쪽 손을 내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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