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cques Oct 20. 2022

"롤라이플렉스로 네 사진을 찍었지.."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Fotografei você na minha Rolleiflex......(롤라이플렉스로 네 사진을 찍었지.....)" 뭄바이 그랜드 하야트의 널찍한 로비에 스탄 게츠, 조빙, 주앙 지우베르트의 끈적한 보사노바 음악이 은은하게 깔린다. 지금 나오는 노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헉헉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와 나이가 같다. 

                                                                                 

                                                                                        <아노말리>, 민음사, 159 page    


책을 사고 펼치자 내 눈에 나온 첫 페이지에, 내가 좋아하는 브라질 노래가 등장하다니. 이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게다가, 올해 인사이동으로 인도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챕터 속의 주인공도 건축가로서 인도 뭄바이로 출장을 나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책 속의 주인공과 나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만큼 즐거운 순간도 흔하지 않다.


업무 특성상 출장을 많이 다닌 편이었고, 코로나19가 잠잠해진 후 인도 사업 담당이 되면서 몇 차례 인도를 찾을 기회가 있었다. 개발도상국 출장을 주로 다녔었는데, 개인적으로 출장을 통해 가기 쉽지 않은 나라를 방문하고 일하는 과정 자체를 즐겨서 매 출장을 설레는 맘으로 기다렸지만 이와 별개로 출장 일정을 수행할 때마다 뭔지 모를 허한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나의 집이 아니어서 개운하지 않은 호텔, 호텔 속의 화려함과 저 너머의 현실간의 괴리, 머무르는 시간이 지극히 짧은 데 따르는 아쉬움, 그리고 출장 후 업무든 성과든, 아니면 이 나라와의 인연이든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출장이라는 유한성에 한없이 잠식되어 허우적되면서도, 그 허무함에 중독되어 다음 출장을 기대하게 된다.


챕터 속 앙드레도 나와 똑같은 심정을 느끼는 듯 했다. 일정에 쫓겨 무기력한 몸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 그 엘리베이터에는 역시나 잔잔하면서도 무기력한 노래가 흐른다. "시차와 슬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앙드레는 돌아오지 않을 메일을 보냈고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릭샤가 달리는 무질서함에 흡수된다. 그리고 뤼시를 생각한다.


8명의, 분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이기에 앙드레의 에피소드 역시 소설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흐른 노래 덕분에 나에게 의미있는 챕터로 기억될 것 같다. 스탄 게츠,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빙, 주앙 지우베르트가 함께 어우러진 이노래의 제목은 Desafinado. 우리 말로 "원키를 벗어난, 불협화음" 정도의 의미가 될 것 같다. 브라질의 음악 장르인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명칭은 이 노래의 가사에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1950년대 말에 태동한 보사노바 장르는 브라질 군부 독재가 들이닥친 1965년 전까지 짧은 전성기를 누리다가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장르가 되었다.


만약 당신이 나의 "반음악(antimusical)"적 행동을

계속 분류하려 한다면

내가 거짓말을 하며 주장해야겠네요

이것이 보사노바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감미로운 멜로디를 듣고 가사 속의 amor를 보면, 아름다운 사랑노래처럼 들리는 이 곡은 사실 보사노바라는 장르를 대변하고 변호하는 노래이다. 보사노바 장르가 등장할 당시 음악 평론가들은 가창력이 돋보이지 않고, 말랑말랑한 리듬과 선율이 가득한 보사노바를 가벼운 음악, 철학이 없는 음악이라 비판하였다. 보사노바 탄생의 주역인 작곡가 카를로스 조빙과 작사가 비니시우스 지 보라에스가 각각 전문교육을 받은 음악인, 외교관이라는 엘리트층이고, 이들이 상대적으로 브라질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절에 사랑과 애수를 가득 담은 노래를 주로 만들었기에 이런 평가 또는 오해가 생길만도 하다. 이에 대해 Desafinado는, 자연스러움이 곧 보사노바라면서 이 새로운 음악을 기성방식으로 분류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출처 : https://notevenpast.org/getzgilberto-fifty-years-later-a-retrospective/)


문득, 나의 출장동안 머물렀던 호텔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렀는지 돌이켜본다. 2019년 파라과이 출장. 출장 치고는 이례적으로 2주 정도 머물렀던 그 호텔에서는 파라과이의 전통 곡조인 Garania의 한 노래가 가사 없이 흘렀고, 호텔에 머무르면서 그 노래의 음을 다 외울 정도가 되었다. 돌아와서 그 곡을 찾아보니,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슬픈 노래였다. Desafinado라는 노래에도 속뜻이 담겨 있던 것처럼, 가사를 몰랐으면 이 노래도 그저 사랑 노래로 치부할 뻔했다. 그리고 더 중요했던 건, 파라과이를 오고가며 브라질 상파울루를 경유했고, 내 인생의 첫 브라질이라는 설렘을 가득 담아 비행기 안에서 Desafinado를 비롯한 브라질의 명곡을 감상했던 순간들. 출장 며칠 전에 전해 온 주앙 질베르투의 사망 소식. 이 모든 것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지금 이 소설의 챕터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2020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보사노바 보컬 워크샵에 참가하며 보사노바와 삼바를 비롯한 브라질 음악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던 순간들도 연결되어 별자리로 빛나고 있다. 다음 출장도 역시 인도가 될 가능성이 높을 텐데, 다음 호텔에선 어떤 선율이 흘러나올까. 혹시나 다음 출장지가 뭄바이이고 엘리베이터에서 Desafinado가 흐른다면 이보다 더 짜릿한 순간이 있을까.


https://youtu.be/So718wk426c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