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와 책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대학교 입시 면접에서는 “당신의 멘토는 누구인가요? 왜 그 사람을 멘토로 삼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예상 질문에 있던 내용이었지만, 멘토로 삼고 있는 훌륭한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식상하지만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얼버무려 답변을 해결했다. 입학식에서는 제비 뽑기로 내 멘토가 될 선배를 정해주었다. 그 선배는 나를 ‘멘티’라고 불렀다. 봉사활동을 하러 찾아간 학교에서는 내게 아이들을 위한 멘토링 활동을 추천해줬다. 사회로 나가기 전, 설렘과 공포에 휩싸인 한 친구는 말했다. “어디 멘토 삼을만한 사람이 없을까? 내가 멘토로 생각하던 선배가 요새 영 별로야. 내게는 또 다른 멘토로 삼을만한 사람이 필요해.”
힐링, 감성, 공감, 위로, 청춘, 취향 같은 단어처럼 ‘멘토’라는 낱말이 대한민국 여기저기 너울대던 때가 있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녀석인지 어원을 찾아봤더니 그리스 신화였다.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Mentor)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여 20년이 되도록 귀향하지 않는 친구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돌보며 가르쳤다고 한다. 후에 그의 이름을 따 ‘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자’를 멘토라 부르게 되었다. 그 단어에는 훗날 상담자, 후원자, 스승의 의미까지 넉넉하게 담아 나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길 바라는 마음까지 실리게 되었다.
멘토에 담긴 절대적인 어감이 부담스러웠다. 멘토도 멘티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사람들에겐 모두 본받을 점이 있는데, 누군가 어떤 사람을 내 목표로 정해야 하는 게 빼도박도 못하게 내 운명이 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 땐 뭐든 내키지 않던 때였으니 뭐든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래서 학교에서 애써 정해준 멘토도 내팽개쳤다. 멘토 선배도 의무감에 멘티들을 모아 점심을 한 번 사 주고선 연락이 없었다. 졸업한 다음까지 멘토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고민이 있을 때면 상담도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어쩌면 그저 멘토란 단어가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나보다.
그런 내게 멘토로 삼고 싶은 언니, 오빠들이 잔뜩 등장하는 책이 나타났다. ‘작가들이 작가에게 듣는 글쓰기 아포리즘’이라는 부제를 가진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은 작가의 명언을 모은 책이다. 책에서는 글 쓰는 법을 말하는 대신 작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작가가 체득한 지혜를 내어준다. 버지니아 울프, 마크 트웨인, 잭 케루악, 조지 오웰, 찰스 디킨스, 헤밍웨이, 애드거 앨런 포를 포함한 작가 서른 명의 목소리를 모았다. 세상에 절대적인 멘토가 없는 것처럼 책에서는 이들의 의견이 상충하더라도 그대로 전달한다. 독자를 의식하고 의견을 반영하라고 하다가 또 다른 사람은 절대적으로 읽는 사람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많은 작품을 접해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색을 위해서 다독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는 점을 잊지 마라. 자신이 가장 읽고 싶은 이야기를 써라. –수전 아이작스
계속 써라. 글쓰기란 결국 유희고, 유희에는 대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법이다. 당신이 진짜 작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쓸 것이다. – 어윈 쇼
예술가라는 존재들은 결코 무리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건 개미들이나 그렇다. 싹을 틔우기 시작한 예술가에게는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의 문제들과 씨름할 특권이 주어져야 한다. –헨리 밀러
마음 속에 제정신이 아닌 무언가를 키워라.
내쉬고 싶은 만큼 깊숙이 숨을 내쉬어라.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끝없이 퍼 올리고 싶은 것을 써라.
문학적, 문법적, 통사적 제약을 없애버려라.
기억하는 것, 자신을 놀라게 했던 것에 대해 써라.
- 잭 케루악
뭐가 됐든 글을 쓰시고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지껄일 말들일랑 걱정하지 마시오.
걸작이 나올지 아닐지도 신경 끄시고.
나는 91쪽짜리 쓰레기를 씁니다. 하지만 1쪽짜리 걸작도 쓰지요.
개인적인 비극은 잊도록 하시오.
우리네 인생은 처음부터 엉망진창이었고 특히 당신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부터 지옥을 맛봐야 했으니.
-어니스트 헤밍웨이, 1943년 F.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이 사회의 분위기가 바뀐 듯 하다. 아무때나 멘토를 찾고 함부로 멘토를 자청하지 않는다. ‘꼰대’라 불리는 게 무서워 후배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말은 물론 요즘은 아예 입을 여는 일까지 극도로 줄이기도 한다.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의견을 반복해서 강경하게 이야기 해주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며, 그럼 대체 어떻게 도와야 좋을지 모르니 일단 가만히 있는 것이다. 생각과 결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계의 일이니 함부로 침범하지 말자는 게 요새 내 주변의 공기다. 이런 와중에 또렷하게 ‘절대적’이라고 말하며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책 속 작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 생소한 자극이었다. 요새 금기시 하는 ‘충고’를 책 속 작가들은 목청껏 한다. 이 의견이 절대적으로 맞다며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꽤나 거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고, 그 중 몇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기 때문일까. 애초에 책 제목부터가 ‘그럼에도 ~한다면’으로 조건을 가정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다.
영화 <내 작은 시인에게> 멘토를 자청하는 주인공을 찾았다. 둘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단순하다. 유치원 선생님과 제자 사이일 뿐이다. 이야기는 선생님이 대단한 시적 재능을 가진 아이 ‘지미’를 알아보면서 서서히 점점 복잡해진다. 선생님 리사는 유치원생 지미의 보모와 삼촌, 아버지를 찾아가 아이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어떻게 지켜줘야 하는지 거듭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단호하게 자본의 세계에서 시는 쓸모없는 것이며, 아들이 글을 쓰길 바라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선생님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지미의 보모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리사가 눈부신 재능의 학생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비춘다. 리사는 지미의 아름다운 시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세상에 알려주고 싶어한다. 재능은 신의 선물처럼 귀하지만 알아봐주는 사람 없이는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리사에 공감하며 일단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다.
리사는 지미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저장해두고 시가 떠오를 때면 연락을 하도록 시킨다. 낮잠 자는 시간에 지미만 깨워 시 읊기를 유도하고, 손을 잡고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야구장에 가기로 한 약속 시간에 부모 몰래 시 낭송회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 지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리사의 욕망은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진다.
“세상이 널 지워버리려고 할 때, 세상에 널 받아줄 사람은 없어. 나 같은 그림자가 될거야.”
결국 선생님은 울부짖으며 아이에게 고백한다. 선생님은 왜 자신을 그림자라고 생각했을까. 그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아이의 시를 리사가 알아챈 것은 분명 그녀의 재능이다. 지미의 시는 그녀만이 탐낼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의 천재성을 키워주려 노력하는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였지만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것 같다. 다섯살의 어린 지미는 시가 떠올랐을 때 “시가 떠올랐어요.”라 말하고 자신을 찾으러 온 선생님에게 “보고싶었어요.”라 얘기하며 그녀의 품에 선뜻 안기지만 리사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전거를 샀다. 틈틈히 친구와 새 자전거를 탔다. 이미 미국과 유럽 대륙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였기에 뒤를 따라 다니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그의 속도와 방향을 그대로 따라 도시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금방 실력이 늘어 돈만 모이면 곧 자전거 여행을 떠나도 될 것 같았다. 매번 미리 지도를 확인해둔 친구 덕에 헤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를 믿는 만큼 친구의 등만 보고 자전거를 타는 때가 많아졌다. 시야가 부쩍 좁아졌다. 길을 건널 땐 주위를 살펴야 한다거나, 모퉁이를 돌 땐 속도를 줄여야 한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상식마저 잃었다. 내게 답은 오직 그의 등 뿐이었다. 장갑을 껴도 손 끝이 꽁꽁 얼어붙던 추운 날이었다. 자전거 길의 시작을 알리는 도로의 바리게이트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 받아버렸다. 정말 코 앞의 방해물이었는데 그조차 피하지 못한 것이다. 친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의 꽁무니에 딱 붙어 달린 것은 나였으니까.
경찰관에게 안겨 차에 올라탄 순간 지미는 말한다. “시가 떠올랐어요.” 아이의 외침은 들어주는 사람 없이 흩어지고 만다. 진정한 의미의 스승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리사는 어떻게 했어야 했던걸까. 지미의 시를 들어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어 지미는 시를 짓지 못하게 될까. 멘토의 선은 어디까지가 적합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갱스터 소설을 쓰기 위해 갱단에 가입한 작가 할란 엘리슨의 책 속 조언을 떠올려본다. 지미가 정말 시인이라면 리사가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다. 우리 역시 같을 것이다. 곁에서 방향을 알려주고 속도 조절을 해주는 멘토가 없더라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예술과 글쓰기에 관해 나는 '진짜' 작가를 낙담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처럼 "그만둘 수 없어서 글을 쓴다"고 말하는 게 작가다. 진짜 작가라면 누가 억지로 그의 손목을 부러뜨릴 수가 없고, 그렇더라도 진짜 작가는 코나 발가락으로라도 글을 써댈 것이다. 누가 기를 꺾는다고 해서 정말로 풀이 죽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할란 엘리슨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
개봉일: 2019. 04.04
상영시간: 97분
감독: 사라 코랑겔로
책<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원제: Advice to Writers
저자: 줄리언 반스, 커트 보니컷, 스티븐 킹 등.
출판사: 다른
발매일: 2017. 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