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묭 Apr 05. 2023

못 버티겠어


꺼내야만 하는 말들이 있다

앞으로 더욱 그러하기 위하여

그러하지 못함을 고백해야 한다

더욱 살아내기 위하여

죽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것처럼

오롯이 나를 위하여 



퇴근길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를 느낀다

나는 왜 이 짐을 이고 다니고 있는가

이른 아침,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전부 꺼낸다

마스크, 메모용 노트, 낙서용 노트, 펜, 지갑

칫솔 치약 치실, 면도기, 콘돔, 타이레놀, 텀블러

여행용 티슈, 지갑, 아이패드, c핀 충전기

8핀 충전기, 다용도 충전핀, 보조배터리, 에어팟

이북리더기, 이북리더기 전용 충전기, 아로마 오일

피우지도 않는 담배와 라이터, 꽁초를 담는 작은 케이스까지



못 버티겠다. 언제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고 끙끙 싸매고 다니는 게 너무 힘들다. 내가 선택하고 넣고 다닌 짐들이기에 누구를 탓할까. 이제는 도저히 무거워서 못 버티겠다. 짐을 정리하려 한다. 상습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들이 아닌 경우에는 과감히 내려놓겠다. 가방도 용량이 적고 가벼운 걸 들고 다녀야겠다. 물건은 그러하면 되겠다. 물건은 그러하면 되는데 마음은?

마음은 어찌해야 하는가.

마음은, 사람은 어찌할 텐가. 무거워 못 버티겠다고 떠나면, 도망치면 그만인 것인가. 도망쳐 떠나온 곳에도 자유는 없다. 결국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버티어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그러하기 위하여 현재 그러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꺼내 보는 것이다. 현재 나의 상태를 꺼내어 여기서 보고 저기서 보고 둘러보는 것이다. 앞으로 더욱 그러하기 위하여.



최근 몇 달간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몸도 무겁고 마음도 무겁다. 하나둘씩 꺾여 간다. 기껏 내었던 의지가 부딪혀 오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죽이고 내 발아래 둘 수 없어서 나를 죽이고 세상의 발아래 고개를 숙인다. 포기하면 편해 내려놓으면 편해. 내려놓고 포기하되 나를 죽이지 않고 그러하는 방법을 배운다. 나를 죽이는 것도 이제는 못 버티겠으니.

살고 싶다 나도. 아니 더욱 그러하기 위하여 죽고 싶다고 말해야겠다.

죽고 싶다.

나는 지금 죽어버리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신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