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를 읽고 쓰는 단상
1. 자본주의, 최저임금, 노동, 페미니즘, 세월호, 희망, 민주주의까지 다양한 주제에서 끊임 없는 희망과 연대를 노래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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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 탓, 구조 탓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해결책 무엇"이라고 묻는 우문에 "질문에 답이 있노나니"라고 정면승부 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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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빅이슈 는 구매와 동시에 나의 소비가 홈리스들의 자본으로 직결되는 구조다. 시각적 명확성을 가지는 통칭 '기부'이외에는 다른 기부는 "저것을 다른데 쓰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고 생각하면사 기부를 자제해 왔는데, 1원의 기부 없이는 비판할 자격 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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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도방 들어만 봤지. 저 뇌 절구질 의미 무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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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데에 수많은 정의와 내적검열을 수용한다. 유아인이 문제가 됐던 부분이 이 대목인데 "페미니스트의 pure definition 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조차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명명하는데 끊임없는 자기모순, 고뇌, 좌절과 검열이 필요하다. 스스로 필터 없이 페미니스트로 저리 쉽게, 쉬이 정의할 수 있는 것이 권력"이라는 점. 실제 주변의 친구들도 페미니스즘 혹은 페미니스트를 수식하는 주된 단어는 "나 역시도 그것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가 뭔가는 아니지만" 혹은 "나도 많이 모자라지만" 등등등. 나로 대표되는 페미니즘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내가 과연 페미니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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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 사태를 겪고 난 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기 검열을 그만뒀다. 나는 나 자체로 여성으로서의 인생을 대변할 것이며, 자기 검열에 전주곡으로 깔린 '내적으로 향하는 폭력'을 나 자신에게 가하는 것을 멈췄다. "어린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를 칭할 수는 있어도 '잘 모르는'을 페미니즘의 한정 형용사로 갖기를 거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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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가지는 각양각색의 페미니즘을 나는 끊임 없이 응원하고, 오색빛깔의 스펙트럼위에 펼쳐지고 말해지는 페미니즘의 발언과 용기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나의 페미니즘의 결과 온도가 다른 사람과 달라 우리의 접점이 충돌로 보여질 수 있다. 페미니스트끼리의 갈등을 '보적보(보x의 적은 보x라는 뜻)'로 비하하는 누군가의 앞에서, 아니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만나 -너무나 다양한 형태로 억압받고 있기에- 수렴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성의 삶과 미래 세대의 희망에 대해서 노래한다. 우리의 충돌은 충돌 자체로 연대다"고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