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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an 27. 2024

메모 말고 기록


메모는 쌓이면 짐이 되고

기록은 쌓이면 뭐라도 된다


책을 삼분의 일쯤 읽다가 묘한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이 문장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이 작가의 다른 글에서 봤던 문장인가? 이 문장을 인용한 다른 책을 읽은 적이 있나? 조금 더 읽다가 기시감이 의심으로 바뀔 때쯤 에버노트 검색창에 책 제목을 검색해 보면 예외 없이 과거의 내가 작성한 독서 노트가 떡 하니 나온다. 


지난달에 공부 리추얼방에서 메이트 재원님이 김연수 작가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공유한 문장에 푹 빠져서 바로 책을 주문했다. 이렇게 멋진 문장이 담긴 책이라면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봐야 한다며 '일단 전자책으로 사서 읽고 정말 좋으면 종이책으로 사서 소장한다.'는 원칙을 깨고 종이책부터 샀다. 설레는 마음으로 서문을 지나 몇 챕터를 읽다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에버노트를 검색해 보니 역시나 2018년의 독서노트가 나왔다. 에버노트에는 옮겨 적은 문장들과 1줄 감상평이 있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어찌나 애틋하고 위로가 되던지"


기억은 강렬한 감정이 동반될 때 오래간다고 하던데 늦은 밤 뜨거운 위로를 받으며 읽었던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게 놀라웠다. 심지어 어떤 책은 2년 간격으로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기억하지 못했고, 어떤 책은 작가의 구시대적인 세계관에 분개하며 책 귀퉁이마다 빼곡하게 반박하는 메모를 적으며 읽었는데 에버노트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2017년에 이미 그 책을 읽고 작성한 독서 노트를 발견했다. 눈으로만 읽지 말고 기록하면서 읽으면 기억이 오래간다는데 다 틀린 말일까? 왜 나는 열심히 메모하며 읽었던 책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몇 번 스스로에게 놀라는 경험을 하다가 읽고도 잊은 책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2017~2018년에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2017~2018년에는 한창 열심히 도서관에서 다니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기에 메모도 밑줄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보고 기억에 남는 문장 몇 개만 사진으로 찍어두거나 필사한 후 돌려줬다. 그리고 기억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읽다가 좋았던 문장 일부를 그대로 필사하던 이전의 기록. 생각을 많이 하며 읽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독서노트를 죽 내려보다가 전체 내용 뿐만 아니라 문장들까지도 세세하게 기억나는 책들의 공통점도 발견했다.


버리지 않고 계속 책장에 꽂아두고 자주 들춰봤다

글을 쓰면서 그 책의 문장을 인용했다 

마인드맵이나 글로 내용을 내 식대로 정리했다


[자기화]와 [반복]이었다. 내 것으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메모하고 밑줄 그으며 읽었고, 책장 정리를 할 때마다 책을 훑어보며 책 내용들도 한 번씩 복기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책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져서 글을 쓸 때도 책 속 문장을 인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시 책을 떠올리며 반복적으로 책의 경험을 되새겼다. 무엇보다 강력한 도구는 마인드맵과 글쓰기였다. 책을 읽으면서 마인드맵으로 맥락과 키워드를 정리하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인드맵을 보면서 내 방식대로 해석한 내용을 글로 적는다. 이전처럼 한 줄 감상평이 아니라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기]다. 책을 따라가듯 읽는 게 아니라 내 호흡과 생각에 맞추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었다. 뇌를 완전히 다르게 쓰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뇌의 전구를 켠다고 말한다. 입시 공부를 할 때 집중이 잘 안 되거나 공부하기 싫을 때는 단순한 산수 문제를 풀곤 했다. 머리를 덜 써도 되는 산수 문제를 풀면서 음악도 듣고 라디오도 들었다. 반대로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면 뇌의 전구를 켜고 어렵고 난해한 수학 문제를 집중해서 풀려고 노력한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과거의 책 읽기 방식이 산수 문제였다면 마인드맵을 그리고 [생각하며] 읽는 방식은 수학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마인드맵으로 정리하며 읽는 요즘의 기록. 키워드를 만들고 맥락에 맞게 순서를 조정하다 보면 머리를 꽤 쓰게 된다.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2017년의 나는 책을 읽으며 잊지 않기 위해, 나중에 어디에 써먹으려고 성실하게 책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그렇게 쌓아둔 메모는 필요할 때 기억나지 않았고 활용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메모를 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기록이 쌓이면 뭐라도 된다'라고 다들 말하던데 '메모는 쌓이면 그냥 짐만 되는' 거였다. 


메모는 산처럼 쌓인 옷더미 같다. 필요한 옷을 찾으려면 옷더미를 헤쳐서 옷을 하나하나 끄집어봐야 한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관리되지 않은 채 오래 보관된 옷은 구깃해져서 다시 입기도 어렵다. 기록은 잘 정리된 옷장이다. 색, 계절, 용도에 맞게 분류가 되어 있어서 필요할 때 빠르게 찾을 수 있고 정리하면서 깔끔하게 세탁하고 잘 접어 넣어두었기에 오래 계속 입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메모와 기록의 차이다.


쓰면 이루어진다던데 아무리 써도 바뀌는 게 없다고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기록의 쓸모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무조건 적는다고 모두 기록이 되는 것도 아니고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가치 있는 기록은 메모와 다르다.




이게 다 MBTI 때문이야


오랜만에 언니와 동생을 만나서 MBTI 이야기만 몇 시간을 하다가 헤어졌다. 우리 세대에게는 4개의 알파벳이 나를 말해주는 증명서가 되어버렸다.


"나는 I라서 이렇게 사람 많으면 정신이 없어."

"나는 N이라서 이런저런 생각이 너무 많아."

"너 진짜 T구나! 역시 T랑은 공감이 안 돼."


MBTI는 과학이라며 주변 지인들의 사례를 근거로 덧붙이며 MBTI가 이거라서 내가 이렇다고 말한다. MBTI를 믿으면 믿을수록 확증 편향의 굴레에 빠지는 기분이다. 4가지 알파벳 중에 마지막 문자는 특히나 기록과 함께 자주 언급된다. 시간 일기부터 업무 일기, 구글 캘린더, 월간 일기, 브런치 연재까지 쓰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파워 J시네요. 저는 P라서 이렇게 계획적으로 기록하는 거 진짜 어렵고 힘들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해진다. 정말 J는 J라서 기록을 좋아하고 P는 P라서 기록을 힘들어하는 걸까? 


내 주변에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일하는 J지만 기록을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즉흥적인 이벤트를 좋아하는 P지만 일기 쓰기와 사진첩 관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글 쓰고 기록하는 게 직업인 작가들 중에는 P가 정말 많다. 내가 좋아하는 김하나 작가는 INFP인데 마인드맵에 푹 빠져서 마인드맵 워크샵을 열기도 하고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20년 넘게 하고 있으며 팟캐스트로 삶에 대한 생각을 기록하고 전한다. P에게도 기록은 소중하고 계획은 필요하다. 그걸 모르는 J도 세상에는 많다.




기록을 오해하지 말기를


기록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인데도 몇몇 오해 때문에 괴로운 숙제가 되어 버렸고 피하고 싶은 마음에 MBTI 탓을 하게 된 건 아닐까. 기록애호가로서 기록이 애꿎은 오해로 외면받는다는 게 더없이 안타깝다. 이 오해는 기록과 메모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이디어나 창의성에 대한 책에서는 메모를 많이 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기록은 적게 할수록 좋다. 메모는 원재료다. 원재료가 많을수록 만들 수 있는 것이 많다. 하지만 원재료를 그대로 두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1차 가공, 2차 가공을 해서 활용하기 좋은 상태로 준비해 두어야 한다. 


기록은 가공이다. 원재료인 메모를 쓸 만한 상태로 만드는 작업이다. 다시 옷더미 예시로 돌아가서, 계절이 바뀌어 옷정리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옷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조건 좋을까? 아니다. 유행이 지나 안 입는 옷, 낡아서 안 입는 옷, 얼룩이 묻어 못 입는 옷은 많아도 쓸모가 없다. 이런 옷들은 주기적으로 정리해서 버려야 한다. 기록은 메모를 쫙 펼쳐놓고 가지치기를 하는 작업이다. 


기록은 편집이다. 그래서 기록을 반복하다 보면 메모를 할 때부터 무엇을 쓸지 말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기록할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기록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이다. 기록은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할지 알려주는 도구다. 기록은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정말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 준다.


기록은 많이 할 필요는 없지만 자주 해야 한다. 안 입는 옷을 계절마다 정리하는 것처럼 쌓아둔 메모를 자주 정리해야 한다. 나는 기록 주기를 일/월/년 단위로 반복한다. 매일 그때그때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구글KEEP 메모장에 두서없이 엉성하게 적어두고 잠들기 전 정리한다. 적을 때는 굉장한 아이디어인 것 같아서 적었지만 밤에 다시 보니 기존 기록과 비슷하거나 크게 쓸모가 없다면 버린다. 그래서 기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메모가 다 중요해서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메모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매일 밤 잠들기 전, 글과 함께 사진첩 정리도 한다. 카페 와이파이 사진, 여러 장 찍은 똑같은 음식 사진, 다시 안 볼 것 같은 사진을 모두 매일 지운다. 작년에 한 강의에서 "여러분의 휴대폰에는 몇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평균 5만 장이 나왔다. 적은 축에 속하는 답변은 1만 장이었고, 10만 장이 넘는다는 답변도 있었다. 내 휴대폰 사진첩에는 늘 100장 미만의 사진이 있다. 밤마다 사진을 지우면 하루치 사진은 5장 미만이 남는다. 한 달 동안 모은 사진은 매월 마지막날 다시 정리한다. 나중에 중요한 자료로 쓸 수 있는 사진,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사진은 파일명에 키워드 태그를 달아서 클라우드에 저장한다. 


(좌) 오늘이 1/27이니까 27일간 모은 사진이 총 67장 (우) MYBOX 폴더에 차곡차곡 정리한 사진들


나는 네이버 MYBOX를 이용하는데 1차로 폴더 별로 구분하고 2차로 파일명 규칙을 통일해서 필요할 때 검색을 통해 빠르게 찾을 수 있게 정리한다. 그렇게까지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는 사진이라면 과감하게 영구 삭제한다. 이 방법을 소개하자 강연 참석자들은 "내 소중한 사진... 어떻게 지워요? 못 지우겠어요!"라고 아쉬워했다. 반대로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소중한 사진이라, 수고를 들여서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정리하자는 겁니다. 소중하지만 수고롭게 정리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소중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기록으로 얻은 자유


나는 이것을 [기록 디톡스]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대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디톡스가 필요하다. 기록 역시 디톡스를 해야 정말 중요한 핵심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매일 밤마다 기록을 지우다 보면 남겨야 할 정말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인지, 흘려보내야 할 키워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지워야 비로소 길이 보인다. 그것이 우리의 키워드, 컨셉, 정체성이 된다.


죽은 메모는 그 누구도 되살릴 수 없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여있는 메모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기록은 메모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기록은 메모의 생명 유지 장치다. 다시 강조하자면 메모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정말 중요한 것 위주로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생각과 메모만 남게 된다. 계속하다 보면 이제 반대로 어떤 생각을 발전시켜야 할지, 무엇을 메모해야 할지,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 알게 된다. 꼭 필요한 생각과 메모만 하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정리와 편집 과정인 기록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든다.


기록은 우리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삶을 더 효율적으로 살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로 삶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말로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 이제 메모 말고 기록을 하자고. 기록으로 우리 삶을 단순하게 최적화할 수 있다고. 그렇게 삶을 구조화해놓고 남는 시간과 에너지로 자유롭게 살아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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