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는 법을 잊어버리고 어른이 된, 우리에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음악조차 못 듣던 일 중독자의 이야기

by 단단
이 글은 뉴스레터 <함께하는 독학클럽> 7월 9일 콘텐츠입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지난주 금요일, 밑미 리추얼 메이커 인연으로 만난 박아름송이님의 음악감상회에 다녀왔어요.

음감회를 진행하는 송이님이 참가자들의 사연을 미리 읽고 정성껏 골라온 음악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아무것도 안 하고 음악만 듣고 있을 수 있을까?

옆자리 분과 대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분주한 것도 잠시, 묵직한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음악에 빠져 저는 마법에 걸린 듯 신명 나게 글을 썼습니다. 두 시간 동안 사연과 음악을 들으며 종이가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카페에서 내가 글을 쓰는 건지 글이 나를 쓰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어요. 테이블 위로 메모지가 수북이 쌓였고, 종이 위로 글자가 손을 앞질러 달려나갔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음감회가 끝나고 비타민 수액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영감과 에너지가 차올랐어요.

들뜬 마음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저는 이 경험을 꼭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4_5_이미지-제작-001.png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음악조차 듣지 못했던 나


제게 음악은 늘 배경이었어요. 음악만 듣기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죠.


3년 전,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음악은 배경에서도 밀려났습니다. 출퇴근길을 함께하던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는 영어 팟캐스트가 들어왔어요.


책을 내고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면서 글이 취미가 아닌 일이 되자, 글 쓸 때 듣던 음악마저 꺼버렸습니다.


"오타 나면 안 돼. 글 전체 흐름이 명확해야 해. 집중이 흐트러지면 안 돼."


퇴사 후 프리랜서가 되면서 음악은 휴식의 자리에서도 밀려났어요. 휴식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음악 대신 명상 가이드를 들었으니까요.


그런 제게 송이님의 음감회는 음악이 사라진 일상을, 해야 하는 것들로만 점철된 삶을 되돌리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었어요. 2시간짜리 음감회에 가는 데 꽤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거든요. 그렇게 다시 음악을 듣는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음악도 듣지 못하고 살았던 걸까요.


52584_2887864_1751952133167646237.jpeg 송이님이 큐레이션한 음악 플레이리스트



나를 만나게 하는

이야기를 쓰자


단단히 마음먹고 가놓고서는 첫 곡이 흘러나올 때,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인스타그램 좋아요를 확인했습니다. 메모지에 적었어요.


이런 나 진짜 싫어. 너무 싫어.


두 번째 곡까지 인스타그램을 보던 저는 휴대폰을 끄고 음악에 집중해 보기로 했어요.


세 번째 곡 Il Postino Poeta.

한여름 초록 밀밭이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곡이었어요.


왜 이렇게까지 SNS 반응에 집착하는 걸까? SNS가 자유로운 창작 생활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울적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SNS로 내 이야기를 파는 사람이잖아. 독자 피드백을 확인하는 건 내 의무 아닐까. 균형을 잡아야 해. 일상에 단절의 시간을 마련해야겠다.


이런 내용의 메모를 쉬지 않고 써 내려갔습니다. 송이님이 골라준 음악을 들으며, 저는 목마른 사람처럼 다급한 손짓으로 제 내면을 만났어요. 창작자로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깨달았어요.


송이님이 큐레이션한 음악이 나를 만나게 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만나게 하는 이야기를 쓰자.


결국 음악이든, 글이든, 사진이든, 뭐든, 창작자가 만들어야 하는 건 '자신을 만나는 경험'이더라고요. 그게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이고요. 용기, 영감, 힘을 주는 좋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어요.


사람들이 왜 소설을 좋아하는지 알겠다. 우리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용기와 영감을 주는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쓰는 나를 상상했다.


52584_2887864_1751952212997362196.jpeg 음악을 들으며 쓰고 또 썼던 메모들 ✍️



나 사실...

놀고 싶어


우리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해

그게 소설일까, 소설을 쓰고 싶어


이런 메모를 쉴 새 없이 남기다 보니 벌써 두 시간이 흘렀어요.

마지막 곡은 Summer, night (전진희)


엔딩 크레딧 느낌이 물씬 나는 음악을 들으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잘~ 놀았다!"


시계를 보지 않고 정신없는 놀아본 기억이 언제였을까요. 기억조차 나지 않더라고요.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이따 나랑 놀래?"


이런 말, 구독자 든든님은 몇 살 때까지 해보셨나요?

저는 10살 이후로는 안 해본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저는 매일 언니랑 인형 옷을 만들어 역할극 놀이를 했어요. 7살 때 늦둥이 동생이 태어나자 그 애를 이불 위에 태우고 온 집안을 달리며 외쳤죠.


"와아아! 애기야!

우리 이번엔 뭐 하고 놀까?"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더라고요.

너무 오래 노는 법을 잊어버려서 이제 놀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게 슬퍼서요.


"나 놀고 싶구나. 신나게 놀고 싶구나."


음감회 장소를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이거였어요.

나는 놀고 싶다는 것. 놀아야 한다는 것.


그동안 제 삶은 '일'과 '휴식' 두 개뿐이었어요. 고백하자면 휴식마저도 일을 위한 준비 단계로 받아들였어요. 제게 '논다'는 의미는 일을 안 한다는 뜻이었어요. 회사 안 가면 노는 거지, 돈 안 벌면 노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니 제대로 놀 수가 없었던 거죠. 힘들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휴가 때 남편과 휴양지에 가서 바다를 보며 망고 주스를 마실 때면 가슴 한 편이 죄책감으로 무거웠죠. '이렇게 돈 쓰면서 놀고먹어도 될까.'


노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저는 놀고 싶다는 생각도, 어떻게 놀아야 할지도 모르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52584_2887864_1751952391828055993.jpeg



뭐 하고

놀아야 하지?


마지막 순서로 송이님이 쪽지를 한 장씩 나눠주며, '갑자기 휴가가 생기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보라고 했어요.


휴가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라

제가 메모에 쓴 내용이 뭔 줄 아세요? 놀랍게도 지금 제 일상이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하고 명상하고

오전에는 집중해서 글을 쓰고

오후에는 강의 준비를 하고 콘텐츠를 만들어서 업로드한다.


회사 월급의 1/3 정도밖에 못 벌고 있는데도 너무 행복하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해. 계속하고 싶어.

악플, 보는 사람마저 지치게 하는 이상한 질문들, 생산성 압박, 이런 것들이 나를 막아서서 가끔 걸음을 멈출 때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 보고 싶어.


퇴사하고 새로 시작한 번역 공부도 너무 재미있어. 아직 엉성하고 부족하지만 영어 문장 사이를 헤엄치는 감각이 정말 짜릿해. 이게 나한테는 노는 건지도 몰라. 다른 언어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그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는 감각이야.


세상에..!

나는 이미 신나게 놀고 있었어! 왜 그걸 몰랐을까


내가 사는 집에 문이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에 문이 하나 더 있었던 거지. 하늘 위로 끝없이 날아오를 수 있는 천공을 발견한 거야. 저 천공 너머로 갈 수 있을까. 날아오를 수 있을까. 너무 그러고 싶어. 그러려면 이제 한바탕 더 신나게 놀아봐야겠어!


52584_2887864_1751952957097215161.jpeg 음감회 포스터도 너무 예쁘지 않나요.



나를 만나서

나와 놀 수 있는 세계


음감회에서 발견한 '놀이'의 새로운 의미는 이것이었어요.


놀이란, 목적도 성과도 없이

나에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시간.


사람마다 놀이 도구가 다르겠죠. 제게는 읽고 쓰는 활동이 그 도구이고요.


일과 놀이는 겉으로 보면 같을 수도 있어요. 어떤 마음과 태도로 하느냐가 다른 거죠.

읽고 쓰는 활동을 목적과 성과를 의식하며 한다면 '일'이 될 테고

목적과 성과를 잊고 그 자체를 즐기면 '놀이'가 될 수 있어요.


구독자 든든님은 시공간을 잊고 마치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 같은 기분을 최근에 느껴본 적 있나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가 토끼굴 아래로 들어가듯 <이웃집 토토로> 메이가 덤불 속으로 들어가듯 말이죠.


저는 음감회가 열린 스티키 플로어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이곳은 다른 세계다."


어두운 카페 안에서 작은 촛불에 의지한 채 음악의 파동 위를 흐르며 쓰고 또 썼습니다. 두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어요. 쉬지 않고 떠오르는 글감을 잡으려고 부지런히 허공에 손을 뻗었죠.


잘 놀다 왔다.

음감회를 나오며 노트에 이 문장을 썼습니다.

이 놀이로 얻은 새로운 힘으로 계속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날의 에너지를 가득 담은, 송이님의 큐레이션 음악을 모아둔 재생목록을 공유합니다.


Static Summer 플레이리스트


52584_2887864_1751952875241850473.jpeg 사연과 음악을 소개해주시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던 송이님 ✨


이 글은 뉴스레터 <함께하는 독학클럽> 7월 9일 콘텐츠입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망한 목표를 되살리는 드림보드 & 12주 계획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