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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Apr 04. 2024

거룩한 그루터기

어머님 전상서

1.   부처님의 뱃속


<아라시야마>


지난 겨울 업무 차 오사카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바쁜 출장 일정 중 하루를 온전히 떼어내 근교에 있는 교토를 다녀왔었다. 한 손에 단테 신곡을 들고. 내가 좋아하는 아라시야마 강이 보이는 햇빛이 잘 드는 카페에 앉아 속으로 단테 신곡을 조용히 낭독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라시야마이다. 그러나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날 유독 이 강은 단테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건너는 검은 빛깔의 <스튁스 강>처럼 여겨졌다.

<금각사>


교토는 일본의 경주와도 같은 고도이다. 794년 간무 천황이 도읍지로 정한 이래, 1868년 무사정권이 가마쿠라로 수도를 옮긴 200년을 제외하고 교토는 일본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교토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구한 문화와 전통이 잘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내가 단테 신곡 중 지옥편을 들고 교토를 여행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신곡이 이탈리아의 중심인 로마를 순례하던 시절 쓰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였던 로마와 일본의 옛 수도 교토는 어딘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 그날 교토의 몇몇 유명 사찰과 신사를 방문하면서 수시로 단테 신곡을 읽고 또 읽었다. 왕권을 강화하고 속세에서 고난 받은 민중들을 교화하고 위로하기 위해 만든 여러 사찰들을 방문하며 지옥의 순례를 시작으로 천국을 향하는 단테의 여정을 묵상했던 것이다.


청수사 정문


교토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찰인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청수사의 입구에는 31m 높이의 삼층탑(산주노토)이 있다. 이 탑은 일본 최대 높이의 탑으로 교토 도심에서도 잘 보일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그 아름다운 탑을 지나면 지신인(즈이구도)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1718녀 재건된 건물인데 다이즈이구보싸쓰 보살을 비롯해 연애, 순산, 육아의 신불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청수사를 방문한 많은 이들은 이곳을 지나 청수사 경내로 진입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곳을 부처님의 뱃속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옛날에는 출산이 큰 일이었다. 제대로 된 산부인과가 있었을 리 없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많은 산모와 아이들에게는 출산은 목숨을 건 사투였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출산은 삶과 죽음을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리라. 나는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엄마를 떠올렸다.  


2.   역겹고 이상한 음식들


네다섯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어려서 병약했다. 늘 감기를 달고 살았고 몸도 삐쩍 마르고 약했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어머니는 온갖 한약과 이상한 음식을 가져와 먹이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굼벵이, 자라, 고양이의 피, 뱀 등이다. 어머니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정성스럽게 한약재와 그 이상한 음식을 함께 달여 나에게 먹이셨다. 쓰디쓴 한약은 어떻게 마시겠는데 이상한 짐승을 달인 물이나 날 것 그대로의 것들은 도저히 삼킬 수 없어 토해내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음식을 먹는 시간이 너무 곤욕스러웠다. 그래서 꾀를 내었는데, 어머니께서 그런 이상한 음식을 준비하고 계시면 훔쳐보고 있다가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는 척하는 나를 깨워 그것들을 내 입에 들이부으셨다. 나는 꾸역꾸역 내 입 안으로 들어오던 이상한 식감과 역한 냄새의 그것들을 뱉어내기도 하고 먹기도 했었던 것 같다.

   

다른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자주 감기와 고열에 시달렸던 것 같다. 병원뿐 아니라 근처에 있는 용하다는 한의원과 한약방 그리고 민간요법으로 유명한 곳들을 많이 다녔던 것 같다. 정확히 내가 어디가 아팠는지는 몰랐지만 어머니는 침, 뜸, 약을 먹이며 내게 정성을 들이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일곱 살이 될 무렵 내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시고 울산에 있는 유명한 안과를 찾아갔다. 눈 검사를 하던 중 내 양쪽 눈에 눈꺼풀 아래 하얀색의 물혹을 발견했다. 그날 의사는 주사기로 물혹에 있던 물을 빼냈다. 그것이 왜 생겨났는지 앞으로 내 눈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피드백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날 어머니는 나는 데리고 용한 무당집을 찾아 내 점괘를 보셨다. 나는 처음 가본 무당집이 무서워 엄마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무당이 말하길 나는 심성이 여리고 착한데 몸이 약해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길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엉엉 울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한숨을 쉬며 나를 꼭 안아주시던 엄마의 손길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3.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머니는 내 눈에 생긴 물혹의 원인을 알기 위해 나를 데리고 대구와 부산의 대학병원과 유명한 안과를 찾아다니셨다. 그때마다 원인 불상의 병이라는 피드백을 받고 그냥 물이 차면 주사기로 물을 빼내는 정도의 시술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어딘가 데리고 갔는데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어떤 분에게 내 눈 상태를 보여주러 가셨다. 그분은 한의사는 아니지만 그 동네에서 침도 놓고, 약도 짓는 분이었던 것 같다. 그분은 내 눈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눈꺼풀을 뒤집어 보시더니 갑자기 가위로 내 오른쪽 눈에 있던 물혹을 잘라 내셨다. 너무 아팠고 놀라서 큰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물혹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혹 안에 있던 물이 터져 나왔던 것 같다. 곧바로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놀란 아버지는 나를 둘러업고 시내에 있는 안과 병원으로 급히 내달리셨다. 힘들게 안과에 도착했지만 그 안과에서는 손 쓸 수가 없고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곧바로 앰뷸런스에 실려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눈이 더 크게 부어올랐다. 안구가 앞뒤로 돌출될 정도로 심하게 커져 있었다. 통증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어머니가 병실에 도착하셨다. 어머니는 두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 된다. 이놈아, 니도 가면 내는 우째 살라꼬”


저녁에 담당 의사가 와서 내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눈이 세균에 감염된 상태이고 지금보다 눈이 더 부어오르면 시신경이나 뇌를 압박할 수 있어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위급 상황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숨죽여 우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하셨다. “만다꼬, 아를 델꼬 가가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었노? ” 그날 밤 어머니는 한숨도 자지 않고 내 곁을 지키셨다. 밤새 울며 내 온몸을 주무르셨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되풀이하셨던 것 같다. “안 된다. 내가 니를 살릴 끼라고 우째 지켜왔는데. 절대로 안 된다.”


항생제와 처방된 약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와 손길 때문이었을까? 새벽이 되어서 내 눈의 붓기를 진정될 기미가 보였다. 오른쪽 눈을 뜨지 못했지만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어머니는 내가 어떻게 될까 봐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내 곁을 지키셨다. 아침에 담당 의사가 내 상태를 확인하고 위험한 순간은 넘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는 안도의 긴 한 숨을 내뱉으셨다. 아버지는 나의 눈에 이상한 짓을 한 일로 어머니와 외가의 원성을 크게 샀다.


4.   새빨간 아기


나는 생일이 두 개다. 원래 생일은 광복절 다음날인데 주민등록 생일은 1월 17일이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를 왜 5개월이나 지나서야 출생신고를 한 것일까? 얼마 전 오랜만에 어머니 생전에 가장 친하게 지내시던 셋째 이모님과 전화를 했다. 이모와 통화 도중에 내가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2   위로 형이 태어났다고 한다. 70-80년대 시골에는 산부인과에서 출산하는 일이 드물었단다. 시내에 조산소와 산부인과가 있었으나 어머니는 10개월 건강하게  키운 남자아이를 집에서 순산했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  지내던 아이가 온몸이 불덩이처럼 끓어올랐단다. 그때 어머니는 산후 후유증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단다. 외할머니가 뒤늦게 울지 않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숨을 쉬지 않았다.


언젠가 외할머니가 과실주를 꺼내 드시고 내게 이런 말씀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가 얼굴이 시퍼러이 질리가 숨을  쉬더라  카나? 온몸이 새빨갛던 아가 새파랗게 변해가꼬, 이게  너거 아부지 때문이다 아이가. 그때  집서 참외만 안사왔으면 아가 그래 안됐는기라


나는 그때 이게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 들었다. 이모의 설명을 듣고나니 내 위로 형이 죽던 날 아버지가 참외 한 박스를 사들고 오셨단다. 그런데 참외를 팔던 집이 그 직전에 초상을 치른 적이 있던 이웃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집에서 참외를 사 오는 바람에 부정이 타서 아기가 숨을 거둔 것이라 생각했단다. 이 일로 아버지는 두고두고 외가에 큰 원성을 샀다.


근데 그 둘째 형이 태어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죽어버려서 어머니는 너무 슬퍼하셨다고 했다. 마음도 힘든데 출산 후에 젖이 돌고, 이 젖을 못 먹이니까 젖몸살이 심하게 왔다고 했다. 그 통증 때문에 어머니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실성한 사람처럼 몇 날 며칠을 슬프게 울었다고  했다. 울부짖었다고. 그래서 이모들이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설득했단다. 죽은 사람 죽은 아는 이미 죽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될 거 아니냐고. 그 당시 형은 두 돌이 지날 즈음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어린 시절이 어머니가 나에게 온갖 이상한 약들을 해 먹이던 것이 모두 이해가 됐다. 병약한 내 건강이 염려가 돼서 온갖 한약이랑 개구리, 고양이, 개 등 가리지 않고 몸에 좋은 것들을 구해 내게 먹였던 것이다. 그게 다 어머님이 나를 살리려고 온 정성을 다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키도 크고 건장한 편이다. 내가 그냥 자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간절한 정성이 나를 이렇게 키워낸 것이다.


나는 최근 몇 달 단테 신곡을 깊이 묵상하며 지옥을 지나고 있다. 내가 신곡에서 목격하는 지옥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기괴하고 힘든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어머니께 다시 태어난 둘째였다는 것을 알고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온갖 생명이 움트는 이 봄날 내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해 주신 어머니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봄이 오니 햇볕은 따사롭고 풀은 소생한다. 아파트 화단 곳곳뿐 아니라, 산책로 사이사이에서 파란 싹이 푸르게 자라고 있다. 죽었던 것 같았던 나무들 사이에도 풋풋한 새 순이 솟아오르고 있다. 곧 푸른 신록의 잎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처럼 생명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꽃을 틔우고 잎을 펼쳐낼 것이다.  


<청수사 본전, 따뜻한 우동 한 그릇>


청수사 관람하고 내려오는 길에 경내에 위치한 공양간에서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다. 금세 나온 우동면 가락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남은 국물은 내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줬다. 그러면서 입구에서 지났던 부처님 뱃속을 떠올렸다. 자식을 앞세우고 고통받으셨을 어머니가 이렇게 따뜻하게 위로받길 기도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에 고통받고 있을 세상의 많은 엄마들에게 한 없는 위로 은총을 내려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어머니께서 주신 몸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남의 슬픔을 헤아리고 품에 안을 수 있도록 용기 낼 것이다.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이 이 땅의 거룩한 그루터기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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