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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Apr 26. 2024

성선설이 맞나요, 성악설이 맞나요?

칸트 vs 쇼펜하우어


0. 들어가기 전에


오랜만에 글을 남깁니다. 최근에 글쓰기를 쉬어가는 이유는 좀 더 내면을 돌아보고 한뼘 더 성장하기 위한 사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해 주시고 연락 주시는 구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쉬면서 좀 더 많은 글들을 읽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좀 더 무르익으면 다시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1. '성선설이 맞나요? 성악설이 맞나요'


<괴테의 집에서 바라본  석양, 여주시 여백서원>

올해 초부터 예술 제본을 배우고 있다. 기존에 있던 책을 뜯어서 다시 양장본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도제식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번에 작업하는 책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과 노자의 <도덕경>이다. 내가 너무 흠모하는 책들이다.  서양의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작가의 책과 동양 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책을 정성스럽게 다시 만들고 있다.


어제 맞은편에서 작업하시던 선생님이 도덕경을 보시더니 문득 이런 질문을 하신다.


'성선설이 맞나요? 성악설이 맞나요'


성선설? 성악설? 순간 생각했다. 이 분은 내가 엮고 있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보시고 질문한 것일까? 아니면 노자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너무 궁금해 다시 여쭤봤더니 그냥 도덕경을 보고 학창 시절 배웠던 게 생각나서 그냥 해본 질문이라 신다. 내가 너무 멀리 나갔다. 내가 칸트와 노자의 책을 다시 엮고 있는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맹자의 성선설은 칸트의 윤리학과 닮은 점이 많다. 내가 지금 엮고 있는 <실천이성비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마음을 더욱 새롭고 더욱 커다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충만시켜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이 그것이다.’


근대 철학의 큰 고봉으로 평가받는 임마뉴엘 칸트는 마음의 도덕법칙을 주장하면서 과거 신적 계시에 의존했던 윤리관을 인간중심의 윤리관으로 전이시켰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그의 철학적 성찰을 '코페르니쿠스적 전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차이를 말하자면 맹자가 정치적 천명론에 기대어 이론을 정립한 것에 반해 칸트의 철학은 신적 계시와의 결별을 예고하는 듯하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 제국 치하에서 칸트의 이런식의 선언은 가히 혁명적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의 사상을 염모 했던 젊은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런 칸트의 '정언명령'이 다소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순자가 노장사상을 인용해 맹자를 비판한 것처럼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어떤 선험적인 윤리적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지(생에의 의지)에 따라 생존하기 위한 욕망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선한 의지를 가진 존재라기보다 다른 종들과 같이 생에의 의지를 가미고 생존 경쟁을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에게 현상 세계란 단지 맹목적 의지가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에게 인식과 감성을 촉발하는 물자체(사물 자체)는 물론 물자체의 범주에 속하는 인간 자체도 맹목적 의지에 지배된다. 욕망은 정신적, 육체적 측면을 포괄하는 맹목적 의지의 주체이다. 인간은 성적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뿐만 아니라 종족 번식이라는 과제는 매우 중요하다. 신체적 에로티즘을 느낀 우리의 몸에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성욕을 통해 맹목적 의지가 진정으로 실현하길 원했던 것은 종족 보존이었다. 성욕은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종족 보존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거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핵심이다.


칸트의 물자체와 표상은 이제 맹목적 의지와 그것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로 전이된다. 여기서 의지는 무엇인가를 촉발하고 생성시키는 힘 혹은 욕망이다. 쇼펜하우어는 현상 세계는 자기 보존을 위해 맹목적 의지가 드러난 것이고 현상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 자체도 맹목적 의지에 의해 생존한다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 사상, 특히 힌두교와 불교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칸트의 자물자체 혹 자유의지를 맹목적인 생명 추구의 의지로 변주시킨다. 의지의 맹목성은 우리 입장에서만 맹목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의지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의미가 어떤 합목적성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이 부분은 스피노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진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쇼펜하우어에게 현상세계란 단지 맹목적 의지가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우리의 감성을 촉발하는 물자체만이 맹목적인 의지인 것은 아니다. 현상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 자체도 맹목적 의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도 물자체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인간 자체가 맹목적 의지에 지배된다는 생각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2. 우리는 모두 상처받기 쉬운 존재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가끔 보는 사람들이야 모른채하거나 외면하면 끝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연인, 가까운 사람 또는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좀 서운하게 하면 그 상처는 너무 아프고 아릴 수밖에 없다.


슬프게도 우리는 삶을 영위해 가는 이상 타인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상처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동물들이 두꺼운 가죽과 털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두꺼운 피부가 있는 이유는 그런 외부의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상의 삶은 상처를 주거나 받는 경험의 연속이다.


우리가 상처를 주고받는 또 다른 이유는 각자가 타인에 대해 외계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바이러스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다가 다른 유기체로 침입하는 순간 유해한 존재가 되듯이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각자 외계 생명체 일 수밖에 없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랑 같은 편일수록 상처는 쓰리고 아프다. 나를 속속들이 일고 내면의 부드러운 살을 내어준 다음 겪는 상처는 그만큼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 상처는 타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야생 아니 전쟁과도 같은 일상에 제대로 된 투구와 갑옷 없이 속살을 내어준 니의 잘못이 있기도 하다. 상대방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나와 같이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므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 대해 험담하거나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들 역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의 나약한 속살을 숨겨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입장이 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나름의 가시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나의 속 깊은 마음이나 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거나 존중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받기도 하고 알고 있으면서도 정녕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의도적으로 또 의도하지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타인 자체나 그의 속 깊은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근대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린다면 '물자체(사물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처를 주는 것은 어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랑스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로 인해 우리는 억압되고 경쟁하며 투쟁해야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나 역시 지옥이다. 그들에게 지옥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선으로 대해야 하고 그러면 그들도 나를 선으로 대할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서로 상극 관계가 아닌 상생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타인은 지옥이다. <존재와 무,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나와 타인이 객체로 규정하고 서로 자신의 욕망을 대상으로 삼는 관계를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타인에게 지옥이고 타인은 나에게 지옥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위하는 듯 하나 사실은 서로 주인공의 자리에 앉기 위해 투쟁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타인을 선으로 대하기도 하고 상생을 도모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의 주인공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존의 자각과 자각한 것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결국, 타인은 지옥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머리 검은 짐승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자조 썩인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은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향하고 있다. 타인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불편하고 때로 고통스럽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검증받고 평가받는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상대방을 고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푸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의 실존을 인식하고 지켜 나갈 수밖에 없다. 나의 독립성과 주체성, 나의 실존만이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을 거부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노벨상을 받으면 작가 생명이 쉽게 끝나겠지만 나는 노벨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작품을 쓸 수 있다”


그가 한 말과 행동은 가장 명예로운 형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제도로 변형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을 잃게 되는 것이라는 강력한 실존 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바람직한 것들의 이면에는 항상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온갖 칭찬과 명예, 비난과 험담도 결국 상대방의 차이를 관찰하는 것을 넘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준이 되는 순간 구분과 차별은 불가피해진다.


3.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한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관계하고 행동해야 할 수 있을까? <자유론>으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다수가 의견을 갖고 있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서, 강제력을 동원하여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은 권력을 장악한 한 사람이 강제력을 동원해서 인류 전체를 침묵시키는 것만큼이나 정당하지 못하다. 어떤 의견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서, 인류가 그 사람이 그 의견을 갖는 것을 막는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사적인 침해에 그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사적인 침해가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느냐, 아니면 다수에게 가해지느냐에 따라 그 심각성은 달라질 것이다. 개인의 의견을 침묵시키는 것은 해악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롭고 바람직한 판단은 폭압과 차별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타인의 평가에 대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 존재할  없다. 밀의 말한 것처럼  세상의 의롭고 바람직한 모든 말들폭압의 씨앗이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 사회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로 살지 못하고 체계와 이데올로기와 타인들이 요구하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요구에 순응하는 삶은 절대 유로울 수도 만족스러울 수도 없다. 그런 삶은 결과적으로 종속과 타율과 노예의 태도를 수반한다.  안에서 자기는 존재할 수도 없고 당연히 어떤 만족이나 행복을 기대할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내적으로 동기부여 되지 않으면 행복의 정복은 요원한 것은 너무 당연하다.


체계, 이념, 집단을 벗어나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각자의 욕망과 체계에 순응하는 인간만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외부의 인정과 재물과 명예욕에 눈이 멀어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인 것이 현실이지만 드물게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날갯짓을 준비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노닐 수 있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새벽 미명에 일어나 위에 있는  장자의 글귀를 읽고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곧 사후 100주년을 맞이하는 작가 카프카도 노장사상과 12세기 한시를 깊이 있게 읽었다는 것도 너무나 위안이 된다.


지금은 어렴풋하지만 무위가 유위를 넘어서는 세상을 지향해 본다. 또 좌충우돌하고 방황하며 가겠지지만 또 피땀 흘리겠지만 놀듯 춤추듯 살고 싶다. 오늘은 뒤처진 새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비우는 시간이 허락되기를 응원해 본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디에라도 가닿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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