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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화랑의 후예

새끼 사자로 거듭나기

by 아레테 클래식

눈발이 거세게 몰아치던 겨울 어느 날, 에녹은 육군사관학교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담담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그의 가슴은 거친 숨처럼 요동쳤다. ‘육사’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이들이 거쳐간 길. 이제 그 길의 시작점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두렵고도 벅찼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잠시 떠오른 얼굴에 입술을 꼭 다문 그는, 가방끈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과거의 슬픔은 이곳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는 '에녹 민간인'이 아니라, '한에녹 생도 후보생'이었다.


“앞으로 갓! 하나 둘 셋 넷!


입교식을 마친 생도 후보생들은 곧장 ‘가입교’라 불리는 혹독한 훈련과정으로 내던져졌다. 추운 겨울, 모두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직각보행을 연습했다. 방향 전환은 무조건 90도, 시선은 정면, 보폭은 정해진 거리. 실수라도 하면 기파생도의 호령이 날아들었다.


“너희는 이제부터 시간으로 사는 존재다. 1분 1초는 곧 생과 사를 나눈다!”


에녹은 전투화를 신고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동기는 조교의 고함에 그대로 PT체조를 받았고, 그 모습을 보며 에녹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버텨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육군사관학교 예비생도과정의 둘째날, 에녹은 새벽 5시에 깨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깨어났다고 하기보단 기상 나팔소리에 의해 끌려 일어난 것에 가까웠다. 매캐한 냄새가 스민 내무반의 공기, 매트리스 아래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쇠파이프 침상, 동기들의 숨죽인 기침 소리까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고 낯설었다.


"나는 어디에 와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제식훈련은 단순한 동작 반복이 아니었다. “차렷!”이라는 구령 하나에 온 몸이 얼어붙었고, “경례!”라는 구령에선 팔이 어깨 위까지 정확히 올라가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반복됐다. 에녹은 신학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시절, 성경을 외우던 그 열정으로 발끝의 각도까지 외웠다. 땀은 흘러내렸지만, 내면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의 얼굴은 점점 군인의 얼굴로 바뀌어갔다.


체력단련은 말 그대로 극기훈련이었다. 처음에는 2km. 주차가 지날수록 거리와 중량은 늘어났다. 5주째 되는 날, 에녹은 완전군장을 메고 5km를 달렸다. 무거운 군장에 짓눌려 폐가 조여드는 듯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버리고 싶었던 수많은 날들의 기억, 신의 침묵 속에서 외롭던 새벽 기도의 눈물, 그리고 다시 살아남고자 했던 그 의지가 그의 다리를 앞으로 밀어냈다.


교육 중 반복된 '습성화 훈련'은 생도 생활의 모든 규칙을 뇌 속 깊이 새기도록 했다. 기상에서 식사, 불침번, 내무정돈, 보고까지, 실수는 곧 단체 얼차려로 이어졌고, 에녹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실수로 동기들이 얼차려를 받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불시에 침상 밑을 검사받는 날, 그는 이미 수십 번 내무반 점검을 마친 뒤였다. 동기들이 그를 '총기 닦는 광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훈련은 단지 훈련이 아니다. 인간을 다시 깎고 새기는 일이다.”

의식행사 시간에는 군인정신과 국가관에 대한 명언이 줄줄이 인용되었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결코 비운이 아니다.”

“사나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는 그 말을 밤새도록 되뇌었다.


그날 저녁 예비생도들은 재교생도들이 도열한 화랑관 광장으로 집합했다. 화랑관 계단에 생도대 지휘부가 정복을 입고 도열했고 생도대 전인원이 휏불을 밝히며 신입 생도를 중심으로 도열했다. 마치 전쟁에 나서기 전날 결기를 다지는 의식 같았다. 엄숙하다 못해 거룩하게 느껴지는 이 행사는 육사의 통과의례인 사자굴 의식이었다.


군가가 낮게 울려 퍼졌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사자굴. ‘사자들이 사는 굴로 들어간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이곳은 진짜로, 사자 같은 사람들이 살았고, 싸웠고, 죽어갔다. 생도 한 명 한 명이 이름을 호명받으며, 가슴을 곧추 세운 채 일렬로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에녹도 그 대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고요한 흥분과 무거운 긴장이 그의 등 뒤에 붙은 배낭보다 무거웠다. 정문 양 옆에는 4학년 생도들이 검은 베레모를 쓰고, 매서운 눈빛으로 신입생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몇은 엄지를 들어 보였고, 몇몇은 침묵 속에 눈빛만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자굴 행사 전날, 에녹은 기훈 프로그램 일환으로 육사 기념관을 관람했다. 선배들이 "무덤 속 사자의 눈을 마주하고 오라"고 말했을 땐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날, 그는 알게 되었다. 기념관 내부는 정적과 전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기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시기, 육군사관학교 제1기 및 제2기 생도들은 퇴교도 피신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관들과 함께 서울 근교의 불암산 일대에 유격대 형식으로 은신하며, 7월 초까지 지속적으로 게릴라 작전을 벌였다.”


사진 속에는 눈에 띄게 어린 얼굴들이 M1 소총을 들고 있었다. 각이 잡힌 모습은 없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포복하며 바위 뒤에 숨어 적을 노리는 생도들. 중학생처럼 보이는 생도 옆에는 교관이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기록 영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암산 유격대는 낮에는 바위틈과 동굴에 은신하고, 밤에는 북한군의 후방을 기습했다. 탄약과 식량이 부족한 가운데, 이들은 야음을 틈타 탄약고를 습격하고, 북한군 통신선을 절단하며, 적의 이동을 지연시켰다. 특히 6월 29일 밤, 생도 12명은 노원 일대에서 북한군 차량호송대를 기습, 적 병력 30여 명을 사살했다는 보고가 남아 있다.”


에녹의 발걸음이 굳어졌다. 그의 또래, 아니 더 어린 생도들이 벌였던 전투였다. 당시 생도들은 복귀 명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했고, 정규군과 같은 급여도, 계급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군인'이라 믿었다. 국가가 무너지던 그 순간, 단 한 줌의 자존심으로 버텼다.


“7월 3일, 북한군은 불암산을 포위했다. 이틀에 걸친 포격과 수색작전 끝에 유격대는 일부가 탈출했고, 다수는 전사하거나 생포되었다. 전사자 중 일부는 이름 없이 공동묘지에 묻혔고, 나중에야 신원이 확인되었다. 살아남은 생도들은 후일 전투 중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거나, 전후 다시 입교하여 정규군이 되었다.”


그날 기념관을 나서며, 에녹은 말없이 불암산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그 산속 동굴에서, 아직도 누군가의 피가 식지 않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사자의 포효를 연상시키는 여단장 생도의 낭랑한 목소리가 교정을 호령했다

고요하던 이곳 화랑대가 44기 생도들의 힘찬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 차고 있다. 백수의 왕 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낭떠러지로 끌고 가 떨어뜨린 후 살아남는 새끼만 기른다고 한다. 44기 새끼 사자들이여. 그대들의 기훈 파견생도(기초훈련 파견생도)들은 어미 사자로서 한계를 극복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 역경을 견디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는 장차 화랑의 후예로서 늘름한 사관생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쓰러지는 자는 청백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화랑의 후예가 되기를 원하는 그대들이여! 험난한 시련 속에서도 지금의 꾼과 열정을 잊지 말고 참아라! 참아라! 또 참아라! 화랑의 후예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어서 기파생도의 우렁찬 목소리가 낭랑히 울렸다.


“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자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부터 사자굴에 들어선다. 그 말은, 오늘부터 네 생명이 너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에녹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오늘 들어서는 이곳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다. 전쟁의 기억, 피의 계보, 정의의 약속이 흐르는 곳이다.’


사자굴을 통과하는 순간, 에녹은 다짐했다.


‘내가 지금 배우는 전술 하나, 사격 한 발, 구보 한 걸음도누군가의 목숨이 지켜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자굴 의식이 끝난 뒤, 에녹은 조용히 자신의 침상에 누웠다. 몸은 만신창이였고, 머리는 멍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상한 따스함이 피어났다.


‘나도 이제 화랑의 후예다.’


육군사관학교의 철문은 결코 만만치 않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나가게 되는 날, 자신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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